필원잡기(筆苑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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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일종의 한문 수필집.

개설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은 일종의 한문 수필집이다. 조선조 큰 학자로 추앙받는 서거정(徐居正)이 역사에 누락된 사실과 시중에 떠돌던 한담(閑譚)들을 채록한 것이다. 우리나라 한문 수필집으로는 신라 때 혜초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나, 최치원의 『쌍녀분(雙女墳)』 등이 비교적 초기 작품들이며, 고려 말기에 오면,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같은 작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여파로 조선에 들어와서도, 한문 수필집이 다양하게 엮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서거정의 『필원잡기』,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이다.

서거정은 당대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적(事蹟)을 널리 채집하여, 역대 창업으로부터 공경대부들의 도덕과 언행, 문장과 정사들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것을 가려 뽑고, 또 국가의 전고(典故)와 떠도는 여항풍속(閭巷風俗) 중에서 사회 교육과 관련된 사례는 물론이고, 나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까지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간결한 필체로 기술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필원잡기』이다. 제목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주위에 널려 있는 이런저런 사실들을 모아 기록했다는 뜻이다.

편찬/발간 경위

1487년(성종 18) 경상도 의성에서 처음 간행되었는데, 서거정의 문인이던 의성 군수유호인(兪好仁)에게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간에서 서적을 출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기에 대다수 책은 지방관의 도움으로 출판되곤 했다. 이 책도 바로 그런 경우다. 당시 관찰사로 있던 이세좌(李世佐) 역시 서거정의 문인이었기에 간행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로 개인 저서이지만, 관찬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초간본에는 서거정의 조카 서팽소(徐彭召)와 문인이던 표연말(表沿沫)의 서문이 붙어 있고, 또 문하생이던 함양 군수조위(曺偉)의 서문도 수록되어 있다. 선생의 문인이자 간행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세좌의 발문이 책 말미에 붙어 있다.

서지 사항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0.5cm, 가로 14.9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모두 2권으로 묶여진 이 책은 고조선 이래의 동국 역사에서부터 실타래를 풀어간다. 단군과 기자조선 등에 관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 고대국가에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일어난 다양한 사실들을 채록하여 싣고 있으며, 조선 건국 이후 그가 살았던 당대까지 군왕 중심으로 에피소드를 차근차근 소개하고 있다.

이어 신료들의 특이한 행적이나 인물평으로 이어지다가, 과거시험에 얽힌 잡다한 이야깃거리나 전해 오던 전설 보따리를 풀어놓기도 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야말로 사랑방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친근감을 더해 준다. 누에가 고치실을 뽑아내는 듯한 그의 맛깔스런 문장, 고금을 통달하지 않고서는 풀어낼 수 없는 다양한 내용들, 이들이 줄줄이 엮여져 있는 것을 보면 왜 저자의 문명(文名)이 그토록 높았던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조선 초기의 인정과 풍물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 다른 서거정의 저작인 『태평한화골계전』과 함께 설화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원잡기』와 『태평한화골계전』은 둘 다 설화집 성격을 지니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 좀 더 격조 있고, 품위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흔히 ‘골계전’이라고 불리는 후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골계전적인 소화(笑話)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금소총(古今笑叢)』에 수록된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태평한화골계전』은 전형적인 소화집인데 반해, 『필원잡기』는 격조 있는 수필집에 가깝다 할 것이다. 둘 다 이야기 제목도 없이 짤막짤막한 내용들을 연편식(連篇式)으로 이어간다는 점에서 서술형식도 흡사하다. 아울러 꾸며낸 옛이야기라기보다는 실화에 가까운 내용이 많다는 점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공통적인 특징이다.

서거정은 『역대연표(歷代年表)』,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 국가적 편찬 사업을 두루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형 혹은 경연 시독관으로 다년간 활동하였던 경력을 갖고 있다. 후세에 남길 만한 자료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큰 자산은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다. 한갓 은둔 처사나 시골 학자들이 쉽게 근접할 수 있는 한담설화들이 아니라, 상당히 격조 있고 고급스런 내용들이 그의 설화집에 많이 실려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필원잡기』의 내용은 『대동야승(大東野乘)』과 『광사(廣史)』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초간본에 의한 사본을 저본으로 삼은 듯하다. 중간본의 발문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광사』 수록본에는 김려(金礪)의 정사발(淨寫跋)이 붙어 있다.

의의와 평가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국역 대동야승』에 김두종(金斗鐘)의 해제와 함께 역본이 실려 있다. 1972년에 간행된 『한국의 사상대전집』에는 성낙훈(成樂熏)의 역문과 함께 이경선(李慶善)의 해제가 수록되었고, 문고판이 유행하던 1981년에는 ‘을유문고’ 시리즈로 역본이 나왔는데, 서광일(徐光日)의 해제와 색인이 붙어 있다. 이렇듯이 오늘날에 와서도 『필원잡기』가 다양하게 간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매력 넘치는 책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김만태, 「서거정의 명리관(命理觀) 연구」, 『국학연구』 제22집,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정교주, 「필원잡기의 문학적 특성」, 『돈암어문학』 8, 돈암어문학회, 1996.
  • 차종재, 「필원잡기의 문체와 수사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제89권, 국어국문학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