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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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년(숙종 31) 홍만종(洪萬宗)이 단군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

개설

『동국역대총목』은 단군에서 조선왕조 때까지의 중요한 사실을 편년으로 기록한 것이다. 일명 『역대총목』으로도 알려진 책으로 저자가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국조보감(國朝寶鑑)』, 『고사촬요(故事撮要)』 등 역사 기록에서 자료를 뽑아서, 동국의 역사 지리를 약술한 책이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홍만종이 63세에 저술하였다. 그는 소론계로서 노론계가 중시하던 『여사제강』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동국역대총목』을 지었다. 이 점은 임상덕의 『동사회강』과 같다. 그러나 임상덕의 『동사회강』은 17세기의 강목체 사서와 달리 주자학적 명분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요소를 보다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강목체의 주자학적 명분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이와 달리 『동국역대총목』은 실세 위주로 역사를 파악하였다. 또 우리 역사를 단군을 정통으로 하여 시작하였다. 홍만종의 부친 홍주세(洪株世)는 서인이지만, 명분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한당(漢黨) 계열이었다. 또 홍만종은 도가와 같은 이단적 사상도 포용하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잡은 것과 관련이 있다.

신완(申浣)은 당시 학자들이 중국의 사실은 잘 알면서도, 한국역사는 잘 모르는 것을 근심하여, 명나라 『역대총목(歷代總目)』의 체재에 따라, 총목편찬을 홍만종에게 위촉하였다. 책머리에 ‘동국역대통도(東國歷代傳統圖)와 지은이의 소서(小序)가 있고, 다음에 범례가 있다. 부록으로 ’지지(地誌)‘가 실려 있다. 끝에는 지은이의 자서(自序)가 있다.

서지 사항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29cm, 가로 19.8cm이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편차는 범례에서 단군(檀君), 기자(箕子)는 『동국통감』 중에 사적이 자세하지 않으나, 단군은 처음 나온 신군(神君)이고, 기자는 입교(立敎)한 성인이므로, 동국계통의 첫머리에 놓고 기록한다고 하며, 위만조선ㆍ삼한ㆍ한사군ㆍ이부(二府)ㆍ신라ㆍ고구려ㆍ백제ㆍ고려와 조선조에서는 18대 현종까지의 역사를 주로 인물 생몰과 중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록하고는 부록으로 ‘건도지지급일이명산대천(建都之地及一二名山大川)’이라 하여 함경도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ㆍ마운령(磨雲嶺)ㆍ마천령(磨天嶺)ㆍ용흥강(龍興江)ㆍ두만강(豆滿江)까지로 끝났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중요한 내용 중 단군과 조선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연수(年數) 고찰(考察)에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는 나라가 존속한 기간과 단군조선의 제1대 단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실제 나이가 얼마인지에 대하여 기록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고조선에 대하여는, 당(唐)나라 무진년(戊辰年: 서기전 2333)에 즉위하여 처음으로 조선(朝鮮)이라 하고, 평양(平壤)을 수도로 삼았고 백악(白嶽)으로 이도(移都)하였다. 뒤에 기자(箕子)의 봉함을 피하여, 장당경(藏唐京)으로 이도하였다고 하였다.

저자는 많은 기록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물론 세세한 부분에 오기가 있을 수 있으나, 『한단고기』의 기록은 골격이 아주 정확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단군왕검(檀君王儉) 이전의 역사가 어느 정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고, 중국 사료에서 나타나는 치우와 ‘황제헌원’의 ‘탁록지전’이나, ‘태호복희, 염제신농, 소전의 유웅국, 공손씨, 소호금천, 제곡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등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건대, 한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옛날에 한국이 있었다(『삼국유사』 원본과 일치). 한인천제가 다스렸으며, 한국 말기에 한웅이 풍백 우사 운사와 오가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으로 가서 신시를 열고, 배달나라를 열어 개천하였다. 이때가 서기전 3897년 갑자 10월 3일이다. 개천 1565년 서기전 2333 무진년에 단군왕검(서기전 2370년 탄생)이 요임금의 기습으로 24년간 비왕으로 있던 웅씨국의 왕성을 점령을 당하여, 무리 800을 이끌고 아사달로 가서, 38세 때 조선을 개국하였고, 서기전 2241년 경자 3월 15일 승하하니, 연수는 130세였다. 단기 1048년인 서기전 1286년에 우현왕 색불루가 백악산아사달에서 제22대 단군으로 즉위하여, 소태단군으로부터 선양받았고, 단기 1908년인 서기전 426년에 구물이 장당경에서 추대를 받아, 제 45대 단군이 되어, 국호를 대부여로 고쳤으며, 단기 2096년이 되는 서기전 238년에 제 47대 고열가단군이 나라를 오가에게 맡기고 입산수도하러 갔다. 서기전 239년 임술년 4월 8일에 해모수가 기병하여 북부여의 시조가 되었으며, 서기전 232년에 단군조선의 오가연정을 폐지하였고, 서기전 86년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북부여를 이었고, 서기전 58년에 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 서기전 37년에 고구려가 되었으며, 고구려를 대진국(大震國)이 계승하였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삼한(三韓)의 유민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동하여 서기전 238년경 이후 한반도 삼한이 성립되었고, 한반도의 삼한을 이어 서기전 57년에 신라, 서기전 18년에 백제, 서기 42년에 가야가 건국되었다. 이후 고려, 조선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김순희, 「홍만종 편찬의 역사서에 대한 고찰 : 『해동이적』과 『동국역대총목』의 비교를 중심으로」, 『문헌정보학논집』, 충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2002.
  • 민황기, 「입암 민제인의 유물과 유적에 관한 연구」, 『유학연구』, 학술교육원, 2008.
  • 여기현, 「홍만종의 품평어 “청절(淸絶)"의 의미범주」, 『반교어문연구』 36권, 반교어문연구회, 2014.
  • 이정일, 「조선후기 소론계 홍만종과 임상덕의 자의식」, 『사학연구』 제109호, 사학연구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