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사(楚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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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과 宋玉(송옥) 등의 운문을 편집한 책.

개설

『초사(楚辭)』는 중국 초나라의 굴원과 송옥의 작품을 비롯하여 한(漢)나라 때의 모방작들까지 포함하고 있는 책이다. 서한(西漢)의 유향(劉向)이 초나라의 운문풍 작품 16개를 모아 책으로 편찬하였다. 굴원과 송옥을 비롯하여, 경차(景差), 회남소산(淮南小山), 동방삭(東方朔), 엄기(嚴忌), 왕포(王褒)와 유향 자신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초사』라는 이름은 한(漢)나라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가 완성된 기원전 91년에 이미 ‘초사’가 유행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의 ‘초사’는 글자 그대로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이었다. 유향의 손을 거치면서 『초사』는 책 이름이 되었다.

『초사』의 주석서는 매우 많은데,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가 가장 오래된 주석서이며, 남송(南宋) 때 홍흥조(洪興祖)가 지은 『초사보주(楚辭補注)』는 왕일의 주석에 설명을 더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주희(朱熹)는 『초사집주(楚辭集注)』를 편찬하여 비교적 간명하게 요점을 밝혔다.

이렇듯 오랜 시기에 걸쳐 읽힌 『초사』는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문학에 간헐적으로 인용되기 시작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초사를 수용하고 변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정치적 혼란기 때면 문인들은 더 적극적으로 초사를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조선 선비들의 유배 시가에 『초사』의 흔적이 잘 드러나는데, 굴원이 간신의 이간질로 인해 쫓겨난 후 지은 「이소(離騷)」가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조선 선비들의 『초사』 수용은 다양한 층위의 문사들이 다양한 양상을 보였으며, 그들의 작품 속에서 다양한 미의식의 확산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서도 굴원의 비장미 넘치는 글과 원망의 미학을 우아하고 숭고하게 잘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세종(世宗)은 『초사』를 이백 번을 읽을 정도로 아꼈다고 전하는데, 왕위에 오른 후 공부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며 주자소에서 인행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1월 12일) 그리고 집현전(集賢殿) 관원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시학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성균관 생원들에게 『초사』를 읽게 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1년 3월 18일),(『세종실록』 17년 6월 26일)

서지 사항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자소에서 간행하였다. 책의 크기는 세로 36.0cm, 가로 21.0cm이고, 지질은 한지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굴원의 생애와 『초사』

『초사』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굴원이다. 초나라 왕족의 후손인 굴원은 어렸을 때부터 영리했으며, 커서는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뛰어나, 26세의 젊은 나이에 좌도(左徒)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좌도는 내정(內政)뿐 아니라 외교를 담당한 중책으로, 굴원이 왕의 총애를 얼마나 받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명문가의 혈통이자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으며 왕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굴원을 시샘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한편 굴원이 살던 시기의 초나라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격동기에 있었다. 주(周)나라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면서 제후국들은 저마다 왕을 칭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초나라는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높은 문화적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부패한 귀족들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굴원 당시의 회왕(懷王)도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진(秦)나라와의 긴장 관계를 원활하게 풀지 못하면서 초나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굴원은 제(齊)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회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상관대부(上官大夫)와 근상(靳尙) 같은 간사한 측근들의 말만 신뢰하여 굴원을 쫓아냈다. 당시 굴원이 비탄한 심정으로 쓴 작품이 「이소」이다.

이후 회왕은 제나라와 연합했다가 다시 배반하고, 진나라와 연합하는 등 외교적인 실책을 거듭하였다. 굴원은 이때에도 열심히 간언하였지만, 회왕은 끝까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아들인 자란(子蘭)의 말만 듣다가 진나라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을 진나라로 보낸 자란에 대해 몹시 반감을 품었으나, 굴원에 대해서는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여론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감지한 자란은 상관대부를 시켜 새로 즉위한 경양왕(頃襄王)에게 굴원을 비방하도록 했다. 또다시 모함에 빠진 굴원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강남으로 쫓겨나 멱라강(覓羅江)에 빠져 죽고 만다.

그런데 후세의 유학자들은 오히려 굴원을 비판하기도 했다. 굴원이 지나치게 자신의 재주를 드러냈고 울분을 삭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군주의 과실을 과장해 폭로했다는 것이다. 즉 유교에서 말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중용(中庸)의 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대로 굴원이 울분을 거리낌 없이 토해내고, 신화 속의 기이한 이야기들까지 자유롭게 노래한 것은 유교의 이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가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슬픔을 그토록 절실하게 노래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최고의 애국자이자 시인으로서 굴원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김인규 역해, 『초사』, 청아출판사, 1988.
  • 류성준 편저, 『초사』, 문이재, 2000.
  • 선정규, 『굴원 평전 - 장강을 떠도는 영혼』, 신서원, 2000.
  • 신두환, 「한국 한문학의 전통적 사유와 문예미 - 조선사인(朝鮮士人)들의 『초사(楚辭)』 수용(受容)과 그 미의식(美意識)」, 『한문학논집』 30, 근역한문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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