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제강(麗史提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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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유계(兪棨)가 지은 고려의 역사서.

개설

『여사제강(麗史提綱)』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유계(兪棨)가 지은 고려의 사서(史書)다. 1667년(현종 8) 간행하였으며,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체재를 모방한 것이다. 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139권 100책)가 너무 방대하여, 요점을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요령 있게 조선시대의 사료(史料)를 몇 가지 사용하고 있으나, 전적으로 『고려사』에 의거하고 체재만 편년체로 바꾼 데 불과하다. 송시열(宋時烈)의 서(序)가 있다.

서지 사항

23권 23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33cm, 가로21.3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저자인 유계(1607~1664)는 조선 후기의 문신ㆍ학자로서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윤선거(尹宣擧)ㆍ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630년(인조 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 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때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작하였다.

그가 지은 『여사제강(麗史提綱)』은 노론 정권하의 고려시대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하여주며, 조선시대의 사료(史料)를 몇 가지 사용하고 있으나, 전적으로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기전체(紀傳體)로 만든 고려의 정사(正史)인 고려사(高麗史)에 의거하고, 체재(體裁)를 편년체(編年體)로 바꿨다.

이 책의 책머리에는 ‘여사제강서ㆍ여사제강범례ㆍ여사제강목록ㆍ여사제강 찬집제서(纂輯諸書)’가 수록되어 있고, 태조기(太祖紀)에서 신창기(辛昌紀; 신창(辛昌)은 창왕(昌王))까지 실려 있다.

이 책의 저술 동기와 역사, 서술 태도 등은 여사제강범례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이미 간행된 『삼국사기』ㆍ『고려사』ㆍ『동사찬요(東史簒要)』ㆍ『동국통감』 등의 기사 내용과 체재, 그리고 사체(史體)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저자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그 내용이 허황되고 터무니없어,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려사』는 역대 전사(全史)의 체를 모방한 결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세가(世家)ㆍ지(志)ㆍ열전에 산재해 있어서, 비록 한 권의 책이지만, 실제로는 세 권과 같아 내용파악이 곤란하다고 지적하였다. 게다가 그 권질(卷帙)이 아주 많아 절반도 보지 않아, 곧 싫증이 난다고 하였다.

『동사찬요』는 기년체(紀年體)로 간략하게 찬집했으나, 따로 열전을 두어 실제로는 두 권과 같기 때문에 참고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하였다. 『동국통감』은 비록 한데 묶여져 있기는 하지만, 강(綱)ㆍ목(目)의 구별과 편년(編年)의 차례가 없어서 읽는 사람이 그 강요(綱要)를 알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던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서에 이미 학문적 불만을 느껴 강목체로 간략한 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가 고려사만을 택한 것은 그 이전의 역사적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이성계(李成桂)가 창왕을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요(定昌君瑤: 공양왕)를 옹립한 뒤 시중(侍中)이 되는 데에서 끝나고 있다. 이것은 고려왕조의 전체 역사를 다룬 사서로서는 불완전한 것이다.

고려 왕조의 멸망과 조선 왕조의 성립 과정에 대한 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빠진 이유는 저자의 확고한 역사적 안목과 판단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 『고려사』 등에 실려 있지 않은 새로운 사료는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 당시 주전론을 주장하던 저자가 청과의 화의가 성립되어, 주화론자에 의해 임천에 유배되었을 때 저술되었다. 저자는 기록의 신빙성, 열람의 어려움 등 기존 사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의례를 따라, 강목체로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이를 통해 군주에게 교훈을 주고 성리학적 의리명분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반영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안설’은 전반적으로 군주의 덕치를 중시하고 신하의 절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대교린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왕조의 부국강병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호란 이후 무너져버린 강상윤리를 바로잡기 위한 유계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위총의 거병에 대해서도 유계는 그가 의리를 밝게 보지 못하고, 이해의 사사로움이 앞섰다고 하는 반면에, 안정복은 이를 비판하면서 그의 거병이 의종의 복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반역의 인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태조의 건국은 『여사제강』 별록을 통해, 유계가 찬탈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의 저자는 우리나라 학자로서 우리 역사를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살리고자 한 노력은 주목된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기년(紀年) 아래 중국의 연호를 달아놓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비록 해마다 중국의 정월 초하루를 받들고 있으나, 이 책은 곧 우리나라의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에 종(宗)이라 칭하고 폐하ㆍ태후ㆍ태자ㆍ절일(節日)ㆍ조(詔)ㆍ제(制) 등의 명칭이 비록 참월하기는 하나, 당시 칭하던 바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는 융통성을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 김경수, 「『여사제강』의 사학사적 고찰」, 『한국사학사학보』 제1집, 한국사학사학회, 2000.
  • 세종대왕기념사업회[편], 『(국역)여사제강』 1-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7.
  • 전제현, 「『여사제강』과 『동사강목』 사론의 분류와 비교」,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