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月印釋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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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세조 5)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쳐 석가의 일대기를 서술한 책.

개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1457년(세조 3) 왕세자였던 도원군(桃源君)이 세상을 떠나자, 세조가 이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에 걸쳐 증보(增補)·수정하여 간행한 책이다. 세조의 명에 따라 당시 편찬에 종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설준(雪竣)·홍준(弘濬)·효운(曉雲)·지해(智海)·해초(海超)·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유학자인 김수온(金守溫) 등 11명이며, 이들은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세종(世宗)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설명 부분으로 하여 합편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석가의 일대기를 담은 『월인석보』의 편찬은 1447년(세종 29) 세조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작성한 『석보상절』에서부터 시작한다. 완성된 『석보상절』을 보고 1449년(세종 31) 세조의 아버지 세종은 석가모니의 공덕을 칭송하는 『월인천강지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1457년 이 두 권을 합쳐 세조는 『월인석보』를 만들면서 약 13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당시 세조는 『월인석보』 편찬에 참여한 김수온과 성임(成任)을 각각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事)와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하여 그 공을 인정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5년 2월 9일)

편찬 동기에 대해서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死六臣)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생긴 정신적인 고통 및 회한과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서지 사항

총 25권으로 되어 있으며, 목판본이다. 세로 31cm, 가로 20.8cm이고, 지질은 닥지이다.

『월인석보』는 전 25권인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20권이다. 이 책들은 서강대학교 도서관, 동국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삼성출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대부분 인출본(印出本)으로 유전하는 것이라서, 현재 상태로서는 목판을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월인석보』 권21을 살펴보면, 이것은 목판본으로서 한산(韓山)에 살고 있던 백개만(白介萬)이 자기 집에서 세조 때의 초간본을 다시 새긴 복각판(覆刻板)으로 조성한 다음 은진(恩津) 쌍계사(雙磎寺)에 유치했던 것이다. 권말의 시주질(施主帙)과 간기(刊記)를 보면, 쌍계사에 봉안할 목적으로 여러 사람의 시주를 받아서 쌍계사의 승려 각수(刻手)가 동원되어 새긴 판임을 알 수 있다. 이 판목은 가각판(家刻板)으로, 현존하고 있는 『월인석보』의 판목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는 『월인석보』의 간행·유통 양상을 실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예술품으로서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이 책에는 『월인천강지곡』 제412∼429장(章)이 실려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내용 가운데 일부에는 『석보상절』 권11 앞부분의 내용이 실려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현존하는 『석보상절』이 산질(散帙)이라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저본(底本 : 초고)을 살펴보면, 『지장경(地藏經)』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역되어 있고, 『석가보(釋迦譜)』·『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등의 부분이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용 표기에서는 방점이 대부분 사라지고, 동국정운식 한자음도 대부분 소멸되었다.

구성/내용

그 구성을 살펴보면 『월인천강지곡』의 몇 수를 먼저 싣고 주석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을 붙이는 형태이다.

『월인석보』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잇는 한글 창제 초창기의 자료로서, ‘표기법, 어휘, 음운, 글자체’ 등 다방면에서 국어사 연구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하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자 표기에서 한글이 한자보다 앞서 나오던 것이 『월인석보』에서는 그 위치가 바뀌었으며, 한자음에 종성 받침으로 ‘ㆁ’을 사용하는 등 표기법의 변화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앞음절의 받침을 뒷음절의 모음에 이어 쓰는 연철법(連綴法)이 사용되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음절 단위로 끊어서 표기하는 분철법(分綴法)이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월인석보』는 1446년(세종 28) 훈민정음 반포 이후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변화된 국어의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특징을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월인천강지곡』과 비교하면, 『동국정운(東國正韻)』식의 한글 한자음의 위치가 바뀌었다.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글 음을 큰 글자로 내세우고 해당 한자는 작은 글자로 오른쪽에 박았는데,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에서는 한자를 큰 글자로 내세우고 한글 음을 작은 글자로 오른쪽에 새겼다. 둘째, 받침 없는 한자음에 대하여 불청불탁의 후음 ‘ㅇ’를 달았다. 예를 들면, 『월인천강지곡』에서는 ‘在’로 표기하였는데 월인석보에서는 ‘在’로 바뀌었다. 셋째, 협주의 추가, 어구의 수정 등 부분적인 손질이 있었다. 넷째, 『석보상절』에서는 우리 토박이말로 되었던 것을 『월인석보』에서는 어려운 한자말로 상당 부분 바꿔 놓았다. 다섯째, “邊은 ᄀᆞ라, 사ᄅᆞᄆᆞᆯ‘에서처럼 문장의 표기는 거의 완벽하게 연쳘 표기지만, ’客은 손이라, 諸法엣 천이 디니라‘에서처럼 분철 표기도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월인석보』는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편찬 간행 되었던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세조 때 다시 편집한 것이므로, 초기의 한글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현존본에 나타난 판각기법이나 인출(印出) 솜씨 등을 보면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조선 초기에 유통된 중요경전이 취합된 것이므로, 당시 불교 경전의 수용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김영배, 「월인석보(月印釋譜) 제이십이(第二十二)에 대하여」, 『한국문학연구』8, 1985.
  • 민영규, 「월인석보해제(月印釋譜解題)」, 『한국의 명저』, 현암사, 1969.
  • 이동림, 「월인석보(月印釋譜)와 관계불경(關係佛經)의 고찰(考察)」, 『백성욱박사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1959.
  • 정연찬, 「월인석보(月印釋譜) 제일(第一)·이(二) 해제(解題)」, 『영인 월인석보』1·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72.
  • 천혜봉, 「월인석보(月印釋譜) 제칠(第七)·팔(八) 해제(解題)」, 『영인 월인석보』7·8,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