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집(河西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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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순창에 은거했던 학자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문집.

개설

『하서집(河西集)』은 조선 전기 순창에 은거했던 학자 김인후의 문집이다.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이다.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전라남도 장성으로 돌아가,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48년(명종 3)에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으로 이거하여, 초학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ㆍ『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ㆍ『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의 저서가 있다.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 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 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의 초간본은 문인 조희문(趙希文)ㆍ백광훈(白光勳)ㆍ양자징(梁子澂) 등의 초본ㆍ교정과 전라 감사송찬(宋贊)의 협조로 1568년(선조 1)에 간행되었다. 초간서에 의하면, 당시 여러 문인들에게 흩어져 있어서 미처 수집하지 못한 유문(遺文)을 별집(別集)으로 간행할 것을 기약하고 있다. 초간본은 부사(賦辭) 1권, 시(詩) 12권, 잡저(雜著) 2권으로 편차(編次)되었고, 조희문의 서(序)가 붙어 있다. 현재 초간본 완본(完本)은 전란으로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고려 대학교 만송 문고에 권3~6까지의 영본(零本) 2책이 소장되어 있다.

그 후 김수항(金壽恒)이 김인후의 현손(玄孫) 김시서(金時瑞), 외증손 이실지(李實之) 등과 함께 초간본에 부록을 첨부하여 14권으로 재편하고 별집 9권을 추가하여 1686년(숙종 12)에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서문과 박세채(朴世采)의 발문이 있으며, 현재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796년 왕명에 의해, 문묘에 배향할 때 유집 간행의 명도 함께 내려져, 삼간(三刊) 작업이 진행되었다. 여기에 김일주(金日柱)를 비롯한 후학들이 원집과 별집을 합해 문체별로 새롭게 편집 증보하여, 전집(全集)이라 이름하고, 연보(年譜)를 첨부하여, 1802년(순조 2)에 원집 12권, 부록 4권, 총 8책으로 완성하였다. 삼간본은 전집본(全集本)으로서 현재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가람 문고,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국립 중앙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서지사항

16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개각판(改刻版)이다. 크기는 세로 34.6cm 가로 22.0cm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16세기 우리나라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대립기인 동시에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체계를 정비하는 시기였다. 하서김인후는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를 지조를 가지고 살다간 인물이었다. 그는 도학과 문장과 절의에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정조대에 이르러 그 도학(道學)이 인정되어, 문묘에 배향되기도 했다.

어려서 기묘사화를 겪은 김인후는 기묘사림의 영향 속에서 학문수업을 했고, 성장해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더불어 수학하였다. 당시는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소학(小學)』이 기피되고, 학문의 분위기가 침체된 상황이었으나, 그는 이황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사림의 기풍을 조장하려 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근무하던 중, 중종에게 『홍문관차자(弘文館箚子)』를 올려, 기묘사림의 신원(伸寃)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문장과 학문이 인정되어, 인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사제지간의 교분을 깊게 맺었다. 이후 인종이 죽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줄 저술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주돈이의 『태국도설(太極圖說)』과 장재의 『서명(西銘)』을 숙독하고,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는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가 현재로서는 유실되어, 연구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김인후는 기묘사림의 사상을 계승한 학자이며, 따라서 그의 학문관은 근본적으로 정주학(程朱學)적 입장에 놓여 있다. 그는 학문의 방법론 또한 주자학의 방법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즉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중시했으며, 학문에 있어 하학상달(下學上達)이라 하여, 매우 쉬운 책부터 형이상학적인 어려운 책으로 차근차근 공부해 나갈 것을 권한다.

『소학』은 『근사록』과 더불어 성리학의 실천을 위하여, 기묘사림이 매우 중요시하던 서적이었다. 따라서 김인후의 학문 또한 『도학(道學)』에 입각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정통 주자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입장에서 벗어난 학문 방법론이나, 불교, 도교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지은 ‘천명도(天命道)’는 권근에서 이황에 이르는 천명관(天命觀)의 흐름인 천ㆍ지ㆍ인(天ㆍ地ㆍ人) 삼재(三才)의 구성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중(中)으로 놓은 것이 그의 천명도의 특징이라 하겠다. 또한 그의 이기설(理氣說)은 이(理)가 기(氣)를 부린다는 주리(主理)적 입장에 서 있다. 또한 그는 기대승의 초기 사단칠정설(四瑞七情說)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1980년 하서 선생 기념 사업회에서 ‘백련초해’ㆍ‘하서초천자(河西草千字)’ㆍ‘하서 유묵(河西遺墨)’ 등을 추가로 수록하여, 『하서전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것이 있다. 『백련초해』는 칠언 절구 100수를 글자마다 하나하나 음(音)과 훈(訓)을 달고 한글로 번역한 것이며, ‘하서 유묵’과 ‘하서초천자’는 김인후의 친필로서,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의 소장본을 고증해 새로 추가한 것이다.

참고문헌

  • 김인후, 『하서 김인후』, 큰글 시문학선 50, 큰글, 2013.
  • 오종일, 「호남의 오현과 죽천 박광전」, 『범한철학』 제26권, 범한철학회, 2002.
  • 이연순, 「하서 김인후 문집 판본 연구」, 『동양고전연구』 제56집, 동양고전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