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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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나라 혜능(慧能)의 어록(語錄)을 적은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을 언해한 책.

개설

『육조법보단경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는 당나라 선사인 혜능의 어록을 적은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에 구결을 달고 언해한 것이다. 혜능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하였으므로, 그의 설법을 엮은 책이라고 하여 책 제목에 ‘육조(六朝)’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에서는 1496년(연산군 2)에 3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같은 시기에 편찬된 『시식권공언해(施食勸供諺解)』 끝에 있는 발문에 따르면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명을 받아 인경목활자(印經木活字)로 300부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중국에서 형성된 선종(禪宗)의 사상사적 원처이자 보고(寶庫)로, 한국과 중국, 일본의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편찬/발간 경위

『육조단경』에 따르면 혜능은 문자를 몰랐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서 성장하였으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하여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어느 날 나무를 갖다 주러 관점에 들렀다가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金剛經)』 구절을 듣고, 불도(佛道)에 뜻을 갖게 되어 치저우[蘄州 ; 기주] 황메이로 제5조인 홍인(弘忍)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약 8개월 간 노역에 종사한 후 비로소 홍인에게 의법(衣法)을 받았다.

이후 676년 난하이 법성사에서 지광(智光)에게 계를 받았다. 이듬해에 사오저우[韶州] 차오치[曹溪]에 있는 보림사(寶林寺)로 옮겨 법을 넓혔으며, 그곳의 자사 위거(韋據)의 청을 받고 대범사(大梵寺)에서 설법하였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홍인 문하의 2대 선사라고 할 수 있다. 후세에 신수의 계통을 받은 사람을 북종선(北宗禪), 혜능의 계통을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에서 발전하였다. 제자로는 하택신회(荷澤神會)·남양 혜충(南陽慧忠)·영가 현각(永嘉玄覺)·청원 행사(靑原行思)·남악 회양(南岳懷讓) 등 40여 명이 있었다.

고려 때 보조국사지눌(知訥)은 혜능이 머물던 보림사의 이름을 본 따, 자신이 머물던 송광사(松廣寺)의 산 이름을 조계산으로 바꾸고, 후학들을 지도할 때 『육조법보단경』과 『금강경』을 주교재로 하였다. 이를 통해 『육조법보단경』은 한국 불교의 핵심적인 선사의 지침서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엄밀한 의미로 이 책은 경(經)일 수 없고, 조사어록이라 할 만하지만,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숭앙을 받았다.

조선 초기에도 혜능의 가르침은 상당히 중요시되었는데, 세종(世宗) 대에는 의정부에서 절의 노비를 혁파하는 과정에서 혜능의 수행을 강조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년 11월 28일) 그런 가운데 1495년(연산군 1) 인수대비와 정현대비(貞顯大妃)의 지원을 받은 원각사(圓覺寺)에서 『시식권공언해(施食勸供諺解)』와 함께 이 책을 대대적으로 인경(印經)하자 조정 대신들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과 세상을 의혹시키는 불교를 전파하려 한다며 적극 반대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7월 1일),(『연산군일기』 1년 7월 5일)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아니라며 조정의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듯 인수대비와 정현대비의 지원을 받으면서 1496년(연산군 2) 내탕(內帑)으로 인경자(印經字)와 인경목활자(印經木活字)를 만들고, 먼저 『천지명양수륙잡문(天地冥陽水陸雜文)』을 찍어냈다. 또 두 대비는 학조에게 『육조대사법보단경』과 『시식권공언해』를 함께 언해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발문(跋文)에 따르면 인수대비의 명령에 따라 『육조대사법보단경』 300부가 간행되었다.

서지 사항

3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6.5cm, 가로 20.0cm이다. 지질은 한지이다.

이 책에 쓰인 활자는 인경목활자이다. 한글의 자형은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ㆍ『남명집언해(南明集諺解)』에 나타난 한글과 비슷하다. 대체로 다르게 나타내는 글자의 상하 크기를 비슷하게 맞추어 나타낸 것이 특이하다.

원간본은 현재 완질이 흩어져 전하는 바, 그 상권은 서울대학교 일사문고와 이동림(李東林)이 소장하고 있고, 중권은 이동림·이승욱(李承旭)이 소장하고 있으며, 하권은 대구의 모씨가 소장하고 있다.

구성/내용

『육조법보단경』에 나타난 가장 주된 사상은 심지법문(心地法門)이다. 여기에는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경전이 아닌 어록을 모은 것인데도 ‘경(經)’이라고 한 것은 불설(佛說)에 버금가기 때문이 아니라, 경법(經法), 즉 법문의 의미라는 뜻이다.

이 책의 표기법 부분에서 표기 글자 체계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글자 체계와 차이가 있다. 초성 체계에서는 각자병서와 순경음 ‘ㅸ ㆆ’이 사라지면서, 『석보상절』의 초성 체계보다 글자가 적다. 합용병서 낱자 ‘ㅺ ㅼ ㅽ ㅳ ㅄ ㅴ ㅵ ㅶ’은 쓰였으나, ‘ㅻ ㅷ’은 보이지 않는다. 종성 표기는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종성해에 규정한 8종성과 ‘ㅿ’이 쓰였으며, 사잇소리 글자는 ‘ㅅ’으로 통일되었다. 분철표기가 우세하게 나타난다.

중성 체계에서는 ‘ㆉ’가 나타나지 않으며, 연철·분철표기에서는 ‘ㄴ, ㅁ, ㄹ’ 등을 말음으로 가지는 체언 중에서 분철되는 예들이 있다. 또한 이전 시기에 비해 연철일 때는 음성모음이 결합하고 분철일 때는 양성모음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며, 조사가 음성모음화 되는 경향 등이 표기법 변천 과정으로 보인다. ‘ㅇ’은 항상 분철로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ㅇ’의 발음상의 문제로 인해 음절의 초성으로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방점 표기를 보면 거성불연삼을 제외하면 체언에서 방점 표기가 바뀌는 경우는 1 음절 거성 체언에 처격조사가 결합할 때인데, 이것은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휘 개별적이다. 또한 상성으로 시작하는 2음절 체언에서 상평형과 상거형이 혼란되어 나타난다. 용언에서는 활용할 때 방점 표기에 차이가 많이 나는데, 방점 표기의 혼란으로 보이는 것은 어말평성화와 율동규칙의 다양화 때문이다. 또한 2음절의 용언 중 두 번째 음절이 상성으로 실현되는 것은 모두 복합 구성이다.

고유어화된 한자어에서는 한자음이나 성조가 달라진 것으로는 ‘樣’'와 ‘仔細히’ 등이 있으며, 이들이 바뀐 이유는 현실한자음의 반영으로 인해 성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仔細히’의 경우 ‘細’가 ‘셔’로 나타나기 때문에 현실한자음의 반영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동국정운(東國正韻)』식 한자음과 비교하여 볼 때 거성과 상성은 서로 혼란되어 쓰인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후대의 중간본(重刊本)이 없으므로 매우 귀중하다. 한자음 표기를 『동국정운』식 한자음에 따르지 않고 현실화한 점 등에서 한국 국어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목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점에서도 서지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김동소, 『육조법보단경언해 하권의 국어학적 연구』, 홍문각, 2000.
  • 남광우, 「육조대사법보단언해 해제」, 『육조대사법보단경언해』 중, 인하대학교, 1976.
  •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세종학연구원, 1996.
  •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