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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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근사록석의 |
한글표제 | 근사록석의 |
한자표제 | 近思錄釋疑 |
분야 | 경전해설서 |
유형 | 한문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헌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정엽 |
간행년일 | 1661 |
권책수 | 14권 4책 |
사용활자 | 무신자본(戊申字本) |
소장처 |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정엽(鄭曄)이 편찬한 『근사록』 해설서.
개설
이 책은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정엽(鄭曄)이 편찬한 『근사록』 해설서이다. 『근사록』은 중국의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학문의 중심이 되고, 일상생활에 요긴한 내용들을 편집한 신유학의 중심문헌이다.
조선에서 『근사록』은 사림파가 널리 보급하고 연구하였으며, 『근사록석의』는 16세기 이황과 이이에 의해 신유학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와 체계가 갖추어진 후, 17세기에 이르러 그 연구가 더욱 심화되고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산출된 학문적 성과이다.
편찬/발간 경위
편자 정엽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성균관 대사성을 오랫동안 맡았으며, 당대 조정에서도 학문 관련 분야에서 중심인물이었다. 편찬에 참여한 김장생과 송시열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던 재야의 산림학자였던 만큼, 이 책은 17세기 서인학계의 관심과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엽은 김장생(金長生)이 시작한 『근사록』 주석 작업을 이어받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에는 생질인 나만갑(羅萬甲)이 정서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그 후 송시열(宋時烈)이 본문과 주석을 구분하고 내용을 고증하여, 1661년(현종 2)에 간행하였다.
서지 사항
14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신자본(戊申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4.5cm 가로 22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근사록』은 원래 송나라 유학자인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장재의 『서명(西銘)』, 『정몽(正蒙)』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장구만을 골라, 편찬한 일종의 성리학 해설서로서, 송학(松鶴)에 있어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원나라의 성리학이 수입되자, 『근사록』도 그 때 함께 들어와 가장 먼저 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과 문종대의 경연에서도 이 책을 강론하였지만, 일반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은 조선 전기 훈구파의 사장(詞章) 중심의 학문을 비판하고, 신유학의 요체를 깊이 이해하기 시작한 중종대에 사림파 단계에 들어서였다. 1519년(중종 14) 구례현감안처순(安處順)에 의해 목판본이 간행되었다. 『소학(小學)』과 함께 중종대 사림파의 상징적인 서적으로 인식되어, 기묘사화 후에는 한 때 엄격히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 단계에 이르러서는 학자가 『소학』과 사서삼경 및 역사서 등을 읽은 다음에 탐구해야 할 성리서(性理書)의 하나로 제시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학자의 필수문헌으로 인식되어, 수많은 판본이 간행되었으며, 17세기 중반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8세기 이익(李瀷)의 『근사록질서(近思錄疾書)』를 비롯한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이 책은 『근사록』의 원문과 원주(原註) 중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을 큰 글자로 제시하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선배 유학자들의 학설을 모은 주석을 붙였으며, 편자의 견해도 실었다. 예를 들어 본문의 첫머리에서는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라는 『근사록』 본문의 첫 구절과 그 원주에 대해서 주희의 보충설명을 비롯하여, 진순(陳淳)ㆍ사방숙(謝方叔)ㆍ이황ㆍ김장생과 편자의 견해를 수록하였다.
이 책에 포함된 몇몇 문제에 대해서는 주석한 사람들의 견해가 달라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미발시(未發時) 지각’의 문제는, 주희가 중화신설 이후 미발을 새로 정의하며, ‘지각미매(知覺不昧)’라는 명제를 제출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미발시에 지각이 어둡지 않다’는 진술이 과연 지각의 실질적인 작용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지각의 잠재적 가능성만을 의미하는지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송시열보다 앞서 이 문제를 제기했던 김장생은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를 통해, 미발과 지각의 관계에 관한 정이와 주희의 견해를 대조하면서, 결론적으로 정이의 견해를 배제하고, 주희의 입장을 정론으로 취하는 논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미 지각작용이 발생하면, 미발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이의 기본입장인데, 주희는 ‘정중유물(靜中有物)’이라는 구절을 미발지각의 의미로 전용하면서, 이를 미발시의 주재활동을 나타내는 술어로 이해하고 있다.
송시열 또한 김장생의 견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미발시에 지각의 실질적인 작용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역(易)의 괘상 가운데 복괘(復卦)를 이발(已發)이 아닌 미발(未發)의 기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지각미매(知覺不昧)’ 명제에 미발의 중요한 함의가 내재되어 있음을 피력한다. 그에 따르면 미발시의 ‘지각미매(知覺不昧)’는 수면상태와 같이 둔감하거나, 의식이 혼매한 시점이 아니라, ‘주재(主宰)’를 통해 마음이 밝고 명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송시열은 ‘의식의 적멸상태’가 아닌 ‘주재하는 마음’으로서 미발의 위상을 정립하게 된다.
참고문헌
- 우정훈, 송일기, 「사계 김장생의 「근사록」 교감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제51집, 한국서지학회, 2012.
- 이선열, 「김장생과 송시열의 미발지각론」, 『유교사상연구』 제39집, 한국유교학회, 2010.
- 황의동, 「기호유학에서 김장생, 김집의 성리학적 위상」『대동철학회지』 제53집, 대동철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