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대전(五經大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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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易)ㆍ서(書)ㆍ시(詩)ㆍ예(禮)ㆍ춘추(春秋)를 다섯 서명을 통칭하는 말.

개설

『오경대전(五經大全)』은 역(易)ㆍ서(書)ㆍ시(詩)ㆍ예(禮)ㆍ춘추(春秋)를 통칭한 것으로 중국 송(宋)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하여 종합되어 연결되다가, 명(明)나라의 영락제(永樂帝)때 오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해져 『오경대전』이란 책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유교의 기초 확립과 더불어, 사대부(士大夫)가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 인식됨과 동시에 그 후의 학문은 이에 기준을 두게 되었다.

‘경(經)’ 은 본래 날줄로서 피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데, 성인(聖人)의 변치 않는 가르침의 의미를 지닌다. 유교에서는 예로부터 시ㆍ서(詩書)를 기본 교재로 채택하였으나, 이것을 ‘경’ 으로 칭하고 권위를 높인 것은 순자(筍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경’ 이란 용어가 성립된 것은 전한(前漢) 무제 때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던 데서 비롯하였는데, 선제는 제유(諸儒)에게 명하여 오경의 이동(異同)을 논하게 하였다. 당시의 오경은 ‘역’ㆍ‘서’ㆍ‘시’ 외에 ‘의례(儀禮)’나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가리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대부분 육경(六經)이란 용어를 즐겨 썼는데, 반고(班固)가 『백호통의(白虎通義)』 에서 '오경' 으로서 ‘역’ㆍ‘서’ㆍ‘시’ㆍ‘예’ㆍ‘악(樂)’을 들면서, ‘오경’이란 용어가 널리 쓰였다고 한다. 영제(靈帝) 때에는 제유를 초치하여 오경의 문자를 정하여, 돌에 새겨서 대학문(大學門)에 세웠다. 그 후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오경은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당(唐) 태종(太宗)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하면서 ‘오경’이 확정되었다.

서지사항

112권 50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크기는 세로 25.3cm 15.7cm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ㆍ『오경대전(五經大全)』은 송대의 주희(朱熹)와 그 학파의 주해를 선택한 국정 표준 주해서였다. 여기서 과거 문제가 출제되었기에 이 두 주해서의 중요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명은 물론 조선도 대전본(大全本)을 표준 주해서로 삼았다. 그런데 대전본은 워낙 졸속으로 만들어졌기에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일지록(日知錄)』ㆍ『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 등에서 대전본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조선에서도 경전이 논란이 된 적도 잇는데, 전통적인 오경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경』은 공자가 서(序)한 『서경』은 뒤에 진(秦) 나라가 서적을 불태운 변을 만나, 1백 편이 없어졌는데, 다행히 제남(濟南) 사람 복생(伏生 이름은 승(勝)이 구수(口授)한 28편과 하내(河內) 여자(女子)가 진상한 ‘태서(泰誓)’ 1편을 얻어, 도합 29편을 금문(今文)이라 칭하여 전해 온 것이다.

『시경』은 옛날에 시(詩)가 3천여 편이 있었는데 공자가 산정(刪定)하여 3백 11편으로 만들었다. 한(漢) 나라 때에 이르러 『시경』을 해설하는 자가 4가(家)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노시(魯詩)는 신배(申培)에게서 비롯하여 위현(韋賢)에 이르러 성행하였고, 제시(齊詩)는 원고생(轅固生)에게서 비롯하여 광형(匡衡)에 이르러 성행하였으며, 한시(韓詩)는 한영(韓嬰)에게서 비롯하여 왕길(王吉)에 이르러 성행하였고, 모시(毛詩)는 모공(毛公)에서 비롯하여, 정현(鄭玄)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뒤를 이어 시를 해설한 자로서, 하륜(河胤)ㆍ전완(全緩)의 무리가 있으나 당(唐) 나라 때의 유현(劉炫)ㆍ유작(劉焯) 두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예경』은 『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의 3종을 아울러 일컫는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에 이씨(李氏) 성을 가진 여자가 『주관(周官)』을 얻었는데, 이는 대개 주공(周公)이 제정한 국가 정치에 관한 법이었다. 이를 하간헌왕(河間獻王)에게 바쳤는데 그 중 유독 ‘동관(冬官)’ 1편이 빠졌으므로 헌왕이 천금을 걸고 구했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고공기(考工記)’를 취하여, 그 빠진 부분을 보충, 도합 6편을 만들어 국가에 바쳤다.

『역경』은 기원전 700년 경에 만들어졌으며, 점술의 원전(原典)이자 중국 정통 사상의 자연철학과 실천윤리의 근원이 되는 책이다. 옛날에는 『주역(周易)』 또는 『역(易)』이라고 하였다. ‘역(易)’은 도마뱀의 상형문자로 ‘변화’를 뜻한다. 즉, ‘주역’이란 ‘널리 변화를 설명하는 책’ 또는 ‘주나라에서 행해지던 역점의 책’이라는 뜻이다. ‘역경’으로 불리게 된 것은 송나라 이후부터이다.

『춘추』는 경문(經文)이 1,800여 조(條), 1만 6,500자(字)로 이루어진 최초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로서, 춘추 시대 노(魯)나라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에 이르기까지 12공(公) 242 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본래는 단행본이었지만 지금은 주석서인 춘추삼전(春秋三傳: 公羊傳ㆍ穀梁傳ㆍ左氏傳)의 부속 형태로 전하고 있다.

‘춘추’라는 말은 시간의 추이(推移)를 상징한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준말로서 ‘일 년간(一年間)’이라는 뜻인데, 본래는 주 왕조(周王朝) 치하 각 제후국의 독자적인 편년사를 가리키는 통칭이었다. 『오월춘추(吳越春秋)』ㆍ『여씨춘추(呂氏春秋)』ㆍ『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등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춘추』는 본래 노나라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궁정 연대기(宮廷年代記)였는데, 여기에 공자(孔子)가 독자적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필삭(筆削)을 가함으로써, 단순한 궁정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유가의 문헌 가운데 『춘추』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ㆍ이루하(離婁下)로서,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배출되는 혼란기에 공자가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세태를 바로잡고자, 『춘추』를 지었다고 하는 제작 동기가 서술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신승하, 『중국사(하)』, 대한교과서, 2005.
  •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6.
  • 呂麗粉, 「《五經大全》、《四書大全》的編修及其對明代經學的 影響」, 『東方人文學誌』 9호, 津出版社, 2010.
  • 이강범, 「명대 『오경대전』 찬수의 배경과 경학사적 의의」, 『중국어문학논집』 제74호, 중국어문학연구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