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전(左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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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책.

개설

『좌전(左傳)』은 공자의 『춘추』를 노나라 좌구명이 해석한 책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ㆍ『좌씨춘추(左氏春秋)』ㆍ『좌씨전(左氏傳)』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722년~481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춘추(春秋)』와는 성질이 다른 별개의 저서로서,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과 함께 3전(三傳)의 하나이다. 원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작성되었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전한(前漢) 말기 유흠(劉歆) 일파가 편찬한 것이다. 다른 2전(二傳)이 경문(經文)의 사구(辭句)에 대한 필법을 설명한 것에 비하여, 이 책은 독립된 역사적인 이야기와 문장의 교묘함이 뛰어나다.

편찬/발간 경위

저자는 좌구명(左丘明)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일설에는 옛날부터 있었던 역사서를 전한의 사상가 유흠이 여러 차례 『춘추좌씨전』이라 언급하며 저자를 좌구명이라고 선전하였는데,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찬탈할 때 이를 그 근거로 삼았을 것이라는 캉유웨이[康有為] 등의 이설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입증이 된 것은 아니며, 유흠 위작설은 일본의 학자 카마타 타다시[鎌田正], 중국의 학자 전목(錢穆) 등이 그 문제점을 밝히고 반박했다.

저자로 알려진 좌구명은 『춘추좌전(春秋左傳)』과 『국어(國語)』를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노나라에서 태사(太史)를 지낸 적이 있으며, 공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전해지지만 자세한 일생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12제후 연표 서」에서는 “노나라의 군자 좌구명은 제자들이 각각 오류를 범하며, 제각기 주관에 집착하여 그 진의를 잃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자의 기록에 연유하여 그 구절을 상세하게 논술하여 『춘씨춘추』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공자와는 의기(意氣)와 지취(志趣)의 좋음과 싫음을 같이 하여, 『논어』「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는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며 공손함이 지나친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러워한다.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러워한다.”고 하였다. 『사기』에 따르면, 만년에 시력을 잃은 뒤에 춘추시대 주나라와 노(魯)·제(齊)·진(晉)·정(鄭)·초(楚)·오(吳)·월(越)나라의 역사를 다룬 『국어』를 지었다고 한다.

한편 이 책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조선 초기에 세종(世宗)은 이 책을 두고 학자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서적이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주자(鑄字)로 간행한다면 반포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며, 목판에 새겨 간행하게 할 만큼 널리 퍼트리고자 하였다.(『세종실록』 13년 2월 28일)

구성/내용

이 책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과 함께 춘추 3전으로 불린 책으로 철학적인 면에 집중한 『공양전』과 『곡량전』과는 달리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면에 치중하였다. 그 결과 보통 경문의 의미를 잘 밝힌 것은 『공양전』, 명분론을 잘 밝힌 것은 『곡량전』,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기록한 것은 『좌씨전』이라고 평하곤 했다. 비록 일부 해설은 암살당하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한 말과 같이 그 내용을 알기 힘든 상황이 첨부되어 있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허구가 아니라, 그 상황에 사람이 했음직한 말을 서술했다.

사실 『사기』도 그런 식으로 윤색된 감이 없지 않아, 한나라 때는 외면을 받았지만, 후한 말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공양전』이 대세였으며, 정현(鄭玄)이 고문에 근거하여 유교 경전을 정리하면서, 비주류였던 『좌씨전』의 위치가 주류의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서진(西晉) 시대에 가면, 3전 중에서도 『좌씨전』이 독보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두예(杜預)이다. 원래 경문과 전문이 분리된 체제였던 『좌씨전』을 한 체제로 재구성하여 경전으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지금도 『춘추좌씨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에 비해 그 내용이 상당히 많다.

또한 『춘추』에서는 사건을 묘사할 때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비평하기 위해 어휘를 달리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라도 그 행동이 악독하면 그의 본명을 그대로 불러서 깎아내렸다. 그런데 『춘추』만 읽어선 이걸 이해하기 힘들지만, 『춘추좌씨전』은 그 어휘를 사용한 까닭을 자세히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고 그 뒤에 사가의 평을 넣는 좌전의 구성은 후대에도 이어져 『사기』와 『한서(漢書)』뿐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고려사(高麗史)』 등 한국의 역사서에도 이어져왔다.

그러나 고대 역사서라는 한계가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여타 고대 역사서들과 맞지 않는 내용들도 제법 있는 편이라,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아직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부분은 『사기』와 많이 상충되는데, 『사기』 역시 그 정확성에 대해서 비판이 많은 만큼 주의해서 봐야할 부분이 많다. 이 때문에 이런 부분을 오점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한 것이 전체적인 내용은 다른 사서들과도 크게 상충되지는 않아 국내에 번역된 서책들은 이런 부분을 소개하는 책들도 다수 존재한다.

다만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의 주석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춘추시대를 장식하는 개막 부분을 포함한 초반 100여 년의 내용이 빠져 춘추시대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춘추좌씨전』은 오랜 시간 읽혀 왔으며, 조선시대에도 『좌전』은 매우 대우받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명언들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춘추』의 구절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다 보면 서사구조가 만들어져 읽기에도 흥미롭다. 캉유웨이, 량치차오[梁啓超], 구제강[顧頡剛] 등 청(淸)나라 말기 신공양학파들은 유흠의 좌전 위작설을 부각시켰고, 이로 인해 한동안 『좌전』의 내용은 상당한 불신을 받았으나, 현대에는 유흠의 『좌전』 위작설은 거의 부정되고 있다. 신공양학파 학자들이 『공양전』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좌전』을 『공양전』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필요 이상으로 부당하게 좌전을 깎아내렸다고 보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여전히 좌전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쟁 중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김석우, 「춘추좌씨전 서진 시기 두예 『좌전』 주석의 몇 가지 형식과 그의 정치적 이상」, 『동양사학연구』130, 동양사학회, 2015.
  • 이시찬, 「『좌전』에 보이는 천인 관계에 대한 고찰-‘재(災)’ 예언을 중심으로」, 『중국문학연구』59, 한국중문학회, 2015.
  • 장영백, 「『좌전』에 나타난 ‘덕론’ 연구」, 『중국어문학논집』73, 중국어문학구회, 2012.
  • 제해성, 「『좌전』의 저자와 저작시기에 관한 검토」, 『중국어문학논집』64, 중국어문학연구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