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풍아(靑丘風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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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간행한 시선집.

개설

『청구풍아(靑丘風雅)』는 조선 전기에 김종직(金宗直)이 간행한 시선집이다. 신라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126가(家) 각 체의 시 503수를 정선하여 실었다. 험벽(險僻)한 고사를 사용한 곳에는 그 본실(本實)을 간략하게 주로써 밝혔으며, 미심하고 난해한 어구에 대해서는 편자의 비평과 풀이를 붙이고 있다.

이 책은 신라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126(家) 각 체의 503수를 정선하였다. 험벽(險僻)한 고사를 사용한 곳에는 그 본실(本實)을 간략하게 주로써 밝혔으며, 미심하고 난해한 어구에 대해서는 편자와 비평가 풀이를 붙이고 있다. 권수에 ‘제현성씨사략(諸賢姓氏事略)’을 붙이고 있으며, 수록된 편수는 다음과 같다. 권1은 오언고시 50수, 권2는 칠언고시 40수, 권3은 오언율시 76수, 배율 8수, 권4는 칠언율시 55수, 권5는 칠언율시 51수, 배율 3수, 권6운 오언절구 35수, 칠언절구 86수, 권7은 칠언절구 99수가 실려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조선조 개인이 엮은 최초의 시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들의 시를 가려 뽑아, 엮은 시선집(詩選集)의 간행은 이미 고려 말부터 있어왔는데, 이런 시선집의 계보를 잇는 작품집이 김종직의 『청구풍아』라고 할 수 있다. 『청구풍아』는 기존에 전래된 김태현(金台賢)의 『동국문감(東國文鑑)』과 최해(崔瀣)의 『동인지문(東人之文)』 등에서 이룩한 전통을 잇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정선(精選)한 책이다.

서지 사항

7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29.5cm 가로 19.1cm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이 현존하는 것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갑진자본(甲辰字本)을 비롯하여, 수종의 필사본이 있으나, 갑진자본은 글자가 선명치 않고, 훼손된 부분이 많으며, 여타의 필사본들(고려대학교본 등)도 완전하게 보존된 것을 볼 수가 없다. 간행시기는 갑진자본에 있는 편자의 서문(성종4년, 1473)과 최숙정(崔淑精)의 발문(성종 6년)에 따라, 일단 성종초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존 갑진자본만이 가지고 본다면, 이 책은 성종 15년 갑진자의 초주(初鑄) 이후에 간행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갑진자본은 활자가 마멸된 것이 많고, 간간이 다른 활자도 충용되고 있어, 실제 이것이 간행된 시기는 성종 15년보다 훨씬 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만 따로 초선한 시선집의 사찬작업은 이미 고려말에 있었는데, 이 책도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룩된 초기성과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의 저자 김종직은 조선세종에서 성종 때 문장가이자 학자이다. 김종직은 지역에 근거를 두고,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이끈 유학자들인 재지사림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대스승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고,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사림파가 형성되면서,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제자들과 지방자치조직인 유향소를 다시 세워, 향촌사회에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생전에 항우가 초나라 회왕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지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사후인 1498년에 사관으로 있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문운(文運)이 융성한 성종조는 건국 이래 안정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명나라와 문화적 경쟁관계에 놓이는데,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흥하여, 자국문화에 대한 자긍심 또한 선시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김종직은 본격적인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이나마 시인과 작품에 평어(評語)를 사용하여 품평하고 있는데, 주로 사용된 ‘여(麗)’풍격을 통해, 당시풍을 선시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성당풍을 시의 전범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과 같은 시대의 서거정이 주도한 시선집인 『동문선』에 실린 작품과 작가가 다르게 나타나는 부분과 아버지인 김숙자의 시를 실음으로써 객관성을 의심케 한 점은 『청구풍아』가 지닌 한계라 할 수 있다.

김종직의 문학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시대의 문인인 서거정과 성현을 들어, 서로 비교하면서, ‘김종직은 도학파(道學派)로서 도를 중시하고, 문학을 말단적인 것으로 하찮게 생각했으며, 서거정과 성현 등은 소위 사장파로서 문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인들은 물론이고, 그 후대의 문인들도 거의 대부분이 문학관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즉 ‘도주문종(道主文從)’ㆍ‘도본문말(道本文末)’과 함께 경문일치(經文一致)의 문학관은 조선조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문학관이었던 것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그의 시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풍격적 특성에 있다. 그의 시풍은 역동적이면서, 호방한 기풍이 드러나는 웅혼미(雄渾美)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는 후대의 평가자들이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면서, 자주 언급한 요소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그보다는 가볍지만 활달하면서도, 흥이 살아 있는 상쾌미(爽快美)가 또 하나의 특성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상의 두가지 시풍은 김종직의 외향적이고 활달하면서, 내면으로는 흥을 간직한 그의 선천적 성격에서 유발된 시풍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시풍은 한가하고 여유가 넘치는 안온미(安穩美)이다. 앞의 두시풍에 비해서는 훨씬 고요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역시 밝은 기조를 유지한다. 이 점은 그가 근본적으로 자기 수양을 목표로 추구하는 유학자인데다 일신을 파란이나 굴곡이 없는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한 외부적 요인 때문에 생긴 후천적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풍을 요약하면 밝고 남성적인 ‘양강미(陽剛美)’가 돋보이며, ‘한(恨)’보다는 ‘흥(興)’을 주조로 하고, ‘침울(沈鬱)’보다는 ‘명랑(明朗)’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김영봉,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학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이양구, 「점필재 김종직의 교육사상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정숙인, 「『청구풍아』에 나타난 김종직의 선시(選詩)의식」, 『우리문학연구』 제29집, 우리문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