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조신(柳川調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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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시대 대마도종씨의 가신으로 유천가문의 1대 당주를 지낸 인물.

개설

조선시대에 양난 이후 대조선 외교 교섭 과정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당시 대마번주 종의지(宗義智)의 가신 중 우두머리로서 그와 함께 활약하며 가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손자인 유천조흥(柳川調興)이 대마번주가 조일 간에 주고받은 국서를 개작하였다는 내용을 중앙막부에 고발한 사건인 유천사건[柳川一件]을 일으켰다가 막부의 최종판결에서 패함으로써 가문이 개역(改易)되어 유천가의 명맥은 끊어졌다.

가계

조부는 대마도(對馬島)종씨(宗氏)의 중신이자 유천씨(柳川氏)의 1대 당주(堂主)로 아들은 유천지영(柳川智永)이다. 손자 역시 종씨의 가신이었던 유천조흥이다.

활동 사항

임진·정유왜란 전후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위해 경철현소(景轍玄蘇)와 함께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풍신(豊臣)·덕천(德川) 정권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전해지는 바로는 ‘낭인(浪人)’, ‘구주(九州)의 상인’, ‘대마의 낮은 신분’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의 출신은 손자인 유천조흥(柳川調興)이 유천일건에서 종씨에게 패소하여 개역(改易)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개역의 형(刑)은 재산을 몰수하고 신분을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1577년에 실정막부(室町幕府)의 12대 장군(將軍)인 족리의청(足利義晴)의 2남 족리의소(足利義昭)에게 파견되어 경도(京都)로 상경하였으며, 1579년 묘심사(妙心寺)의 승려 천형(天荊)이 우무위전(右武衛殿)의 사자로 조선에 건너왔을 때 동행하였다. 그때 유천조신은 조선으로부터 아버지인 사맹이라다라(司猛而羅多羅)의 후계자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관직을 받음으로써 수직인(受職人)이 되었다. 그 후 이나군대(伊奈郡代)를 거쳐 대마번주 종의지에게 중용되어 가신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전후의 대조선 교섭에서도 대마도주 종의지와 함께 여러 가지 외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590년(선조 23)에는 정사황윤길, 부사김성일, 종사관황신으로 구성된 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실현시킨 공으로 오위(五位) 제대부(諸大夫), 하야수(下野守)가 되었다(『선조실록』 29년 5월 2일)(『선조실록』 29년 6월 12일).

또한 관원[關ヶ原] 전투에서 종의지가 석전삼성(石田三成)에 속하여 복견성(伏見城)을 공격한 것도 조신의 변명으로 처벌을 면하였다. 1605년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유방원(流芳院)이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田代和生, 『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 田代和生, 『書き替えられた國書』, 中公新書, 1983.
  • 荒野泰典, 「大君外交體制の確立」, 『近世日本と東アジア』, 東京大學出版會, 1988.
  • 김문자, 「秀吉의 조선재침략 직전의 일본측 동향에 대해서 -柳川調信의 활동을 중심으로」, 『상명사학』3·4합집,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