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극돈(阿克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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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청나라 관리.

개설

아극돈은 장가씨(章佳氏)로 만주 정람기(正藍旗)에 속하였다. 1709년에 진사로 출사하였는데, 강희제에게 발탁되어 시강학사가 되었다. 건륭(乾隆) 연간에 벼슬이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1758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극돈은 조선에 4차례 사신으로 왔다 갔는데, 1차는 숙종의 안질 치료제를, 2차는 청나라 황태후의 부고를, 3차는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4차는 경종 죽음에 대한 조문과 영조의 왕위 책봉을 위한 사행이었다.

활동 사항

아극돈은 1709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학문이 뛰어나 강희제(康熙帝)가 시강학사(侍講學士)로 발탁하였다. 이후 내각(內閣) 학사(學士), 한림원(翰林院) 장원학사(掌院學士), 예부(禮部) 시랑(侍郞), 국자감(國子監) 좨주(祭酒), 협변대학사(協辦大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신강의 준가르[準噶爾] 전장에 파견되어 전쟁을 막기도 하였다. 72세 때인 1756년 안질로 사망하였다.

아극돈은 청나라 사신으로 1717년부터 1725년까지 총 4차례 조선을 다녀갔다. 3차 사행이 끝난 뒤에는 조선 사행의 체험을 『동유집(東游集)』으로 엮었다.

1차 사행은 1717년에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에서 청에 숙종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한 탓에 안질 치료제인 공청(空靑)이 필요하므로, 무역을 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하여 청나라가 아극돈을 보내 어부(御府)에 있는 공청(空靑) 1매(枚)를 가져다주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극돈은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넜다(『숙종실록』 43년 10월 13일). 10월 27일 한양에 도착하였고 11월 5일 한양을 출발하여 복명하였다.

2차 사행은 1718년이었는데, 청나라 황태후의 부고를 알리기 위함이었다(『숙종실록』 43년 12월 27일). 1718년 1월 4일에 한양에 도착하고 나흘을 머물고 귀국하였다. 3차 사행은 1722년인데, 경종의 동생인 후일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의 왕세제 책봉을 위한 것으로, 5월 27일 한양에 도착하였으며(『경종실록』 2년 5월 27일), 6월 4일 북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4차 사행은 1724년 12월에 경종의 승하로 인한 조문과 영조 및 왕비의 책봉을 위하여 부칙사로 봉명을 받고 온 것이었다. 1724년 12월 19일 북경을 출발해 다음해인 1725년 3월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아극돈 등은 조문을 하고 경종에게 각공(恪恭)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조에 대한 책봉을 행하였다(『영조실록』 1년 3월 17일). 이때 아극돈에게 은을 주는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연접도감(延接都監) 신사철(申思喆)은 아극돈이 1717년 공청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전례대로 사신에게 주는 것 외에 은 4,000냥을 더 주었는데, 이것이 이후 관례처럼 되어 더 주게 되었다면서 그 부당함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조는 갑자기 변경하였다가 사신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나라에 해가 될 수 있으므로 주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영조실록』 1년 3월 21일).

저술 및 작품

『덕음당집(德蔭堂集)』, 『동유집(東游集)』 등.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박종훈, 「청 사신 아극돈의 조선 인식-『봉사도』와 연관하여-」, 『온지논총』31, 2012.
  • 정은주, 「아극돈 『봉사도』 연구」, 『미술사학연구』 246·247,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