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토리(弘所土里)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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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소토리 |
한글표제 | 홍소토리 |
한자표제 | 弘所土里 |
관련어 | 건주여진(建州女眞),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명/조선 |
왕대 | 명/조선 |
집필자 | 이선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훙바투르([洪巴圖魯], hūng baturu), 아르가투 투먼([阿爾哈圖土們], argatu tumen) |
성별 | 남 |
생년/일 | 1580년 |
몰년/일 | 1615년 |
출신지 | 건주여진(만주) |
관력 | 타이지[台吉], 버일러[貝勒]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모: 원비(元妃) 퉁기야([佟佳], tunggiya)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소토리(弘所土里)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2년 3월 9일 |
청 태조누르하치의 맏아들인 아이신기오로 추연([愛新覺羅 褚英], aisin gioro cuyen)의 한자 이름.
개설
추연은 처음에는 군정과 관련한 사무의 일부를 아버지와 함께 나누었다. 홍소토리라는 이름은 추연이 1598년 안출라쿠([安褚拉庫], anculakū)를 정벌한 공으로 받은 칭호인 훙바투르([洪巴圖魯], hūng baturu)를 의미한다. 여기서 ‘所’는 ‘소’가 아닌 ‘바’라는 발음을 한문으로 기재한 것이다. 추연은 동해여진에 대한 전공을 바탕으로 훙바투르라는 칭호를 얻었고, 이후 울라([烏拉], ula)의 군대를 격파한 공으로 ‘넓은 지략’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르가투 투먼([阿爾哈圖土們], argatu tumen)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추연은 내부적으로 권력 기반을 다지는 듯하였으나, 결국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탄핵되어 1613년에 유폐되었고, 2년 뒤 아버지에 의하여 죽게 되었다.
가계
추연은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의 맏아들로 원비(元妃) 퉁기야([佟佳], tunggiya)씨 소생이다. 암바 버일러([大貝勒], amba beile) 다이샨([代善], daišan) 의 동모형이다. 3명의 처첩을 두었고,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多羅安平貝勒], doroi elehun beile), 두두([杜度], dudu), 호쇼이[和碩] 경친왕(敬親王)니칸([尼堪], nikan) 등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추연은 누르하치로부터 일찍이 타이지의 작위를 받았다. 1598년 안출라쿠에 대한 정벌을 성공적으로 전개하였다는 공으로 인하여 훙바투르라는 칭호를 받고 버일러([貝勒], beile)가 되었다. 1607년에는 조선의 경내에 해당하는 함경북도 종성(鍾城)의 오갈암(烏碣岩)이라는 곳에서 울라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 사건은 두만강훈춘 일대의 피오성([斐悠城], fio hoton)에 거주하는 여진인들이 울라 버일러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누르하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슈르가치([舒爾哈齊], šurgaci)와 함께 추연 등을 보내어 이들을 호송하게 한 데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투의 결과 부잔타이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당시 슈르가치는 부잔타이와 겹사돈을 맺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울라에 대한 공격에 소극적이었으나, 추연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침으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추연은 이때 지략과 용맹을 인정받아 아르가투 투먼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추연은 슈르가치의 맏아들 아민([阿敏], amin)과 함께 울라부의 이한산성([宜罕山城], ihan alin hoton)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추연은 건주여진(建州女眞) 시기에 세운 이러한 전공을 바탕으로 아버지인 누르하치와 함께 권력을 나누어 쥐게 되었다. 추연은 특히 군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였고, 누르하치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였다. 1610년 조선 평안도만포첨사(滿浦僉使) 김응서(金應瑞)와 평안도병마절도사 유형(柳珩)의 보고에 따르면 추연이 폐사군(廢四郡) 일대인 여연(閭延) 지방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면서 눈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계로 올리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3월 9일). 조선에서도 건주여진의 또 다른 권력자 추연의 거취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추연은 성품이 잔학하고 도량이 좁아 반대 세력 역시 적지 않았다. 특히 추연은 어이두([額亦都], eidu), 피옹돈([費英東], fiongdon) 등 개국오대신(開國五大臣)은 물론 여러 동생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대신(五大臣)은 위망이 높았고, 세력이 강했으며 전쟁 경험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추연을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추연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정치적 입지는 좁아졌다. 오대신은 추연의 여러 동생들과 함께 누르하치에게 추연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하였고, 추연은 고립되었다.
누르하치는 1612~1613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울라 정벌에서 추연을 배제하였고 유수(留守)하도록 하였다. 추연은 누르하치의 출병 시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아버지에 의하여 권한을 모두 박탈당하고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추연의 죄는 네 버일러[四貝勒]와 오대신을 이간하여 서로 불화하게 하였다는 점, 여러 동생 버일러들의 재물을 취하여 불만이 고조된 점, 일찍이 “내가 즉위하면 나에게 적대하였던 동생들과 대신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점 등이었다. 이후 누르하치는 여러 차례 추연의 태도를 바꾸고자 하였으나, 추연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누르하치는 1615년 8월, 추연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묘소
추연은 1615년 누르하치의 결정에 따라 처형되었다. 향년 36세였다. 죽은 뒤에는 동경릉(東京陵)에 안장되었다. 청 태종이 즉위한 뒤에 아르가투 투먼([阿爾哈圖土們], argatu tumen)이라는 명칭을 한자로 옮겨 광략 버일러[廣略貝勒]라고 하였다.
상훈 및 추모
추연에게는 별도의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장악하였던 군권은 동생 다이샨과 아들 두두에게로 나뉘어졌다. 두두는 홍타이지에게 큰 신임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역시 많은 전공을 바탕으로 버일러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杜家驥, 「<滿文老檔> 太宗朝的多鐸應爲杜度考」, 『史學集刊』, 1998年 3期.
- 王强, 「杜度生卒年小考」, 『中國書法』, 2013年 7期.
- 李景蘭, 「關于努尔哈赤長子褚英之死」, 『故宮博物院院刊』, 1986年 1期.
- 周遠廉, 「太子之廢-淸初疑案之一」, 『社會科學輯刊』, 1986年 1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