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의홍(島津義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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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戰國)~강호(江戶) 시대의 무장·대명(大名).

개설

구주(九州) 남부의 유력 무사가문인 도진씨(島津氏)를 대표하는 맹장이다. 가독(家督)이었던 형 의구(義久)를 보좌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도진씨의 판도가 확대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모두 조선에 출진하였으며, 특히 사천(泗川) 전투에서의 전공이 저명하다. 당시 명과 조선 측의 사료에는 그의 명칭을 ‘석만자(石蔓子)’, ‘심안도(沈安道)’, ‘심안돈오(沈安頓吾)’ 등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도진’의 일본어 발음인 ‘시마즈’를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의홍의 이름을 두고는 조선 조정 내에서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2년 1월 26일).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 때에는 서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패전한 뒤, 가까스로 구주로 귀환하였다. 오랜 교섭 끝에 덕천가강(德川家康)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은거생활로 말년을 보냈다.

가계

도진씨의 가계는 겸창(鎌倉) 시대(1185년~13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무신정권이 존속한 시대로 알려져 있다. 도진씨의 시조인 도진충구(島津忠久)는 겸창막부의 1대 장군 원뢰조(源賴朝)의 서자라는 설도 있다. 충구 이래로 도진씨는 구주의 유력 무사가문으로 군림하였다. 한편, 풍신수길(豊臣秀吉)에 복속했을 당시 도진씨의 가독직이 의구로부터 의홍에게 넘어갔다는 설도 있지만, 당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의구, 의홍 이후 도진씨의 가독직은 의홍의 아들 충항(忠恒)과 그 후손에게 계승되어갔다.

활동 사항

시종일관 무장으로서 괄목할 만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572년 목기원(木崎原) 전투에서는 전력이 약 열 배에 달하는 이동씨(伊東氏)의 군대를 궤멸시켰으며, 1578년 이천(耳川) 전투에서는 형 의구를 도와 수적 우위에 있던 대우씨(大友氏)를 격파하여, 도진씨가 구주의 패자로 거듭나는 데 공헌하였다. 1587년 일본열도의 통일을 도모하던 풍신수길이 구주에 침공했을 때는 결사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항복을 주장하는 의구의 뜻에 따랐으며, 1588년에는 수길로부터 풍신 성을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전체 일본군 중 네 번째 부대에 속했는데, 가신단의 반란 등 영국(領國) 내의 혼란으로 인해 군사동원과 출진이 뒤늦어 빈축을 샀다. 조선에 건너가서는 강원도로 진공하였고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했다. 정유재란 때도 출진하여 칠천량 전투에서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남원 전투를 전후로 도진의홍군은 조선에서 약탈·살육·코베기를 자행하였다. 이후 사천으로 돌아와 새로운 진지인 사천 신채(新寨)를 구축하였다. 이윽고 풍신수길이 병사하자 일본군은 철군 준비에 들어갔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조명(朝明) 연합군은 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 일환으로 벌어진 것이 사천 전투이다. 약 다섯 배에 달하는 조명 연합군을 맞이하여 의홍은 분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의홍은 이후 노량해전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실록에서는 특히 사천 전투를 전후하여 의홍 관련 기사가 풍부하게 보이는데, 맹장으로서의 면모는 조선 조정에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선조실록』31년 12월 29일). 칠천량 전투와 남원 전투·사천 전투는 도진씨 집안의 자랑거리로서 『정한록(征韓錄)』에 수록되어 있다.

1600년에 발발한 관원 전투에서 의홍은 본래 동군에 가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보전달이 원활치 않아 복견성(伏見城)에서의 합류가 거부당하자, 태도를 바꿔 서군에 가담하였다. 동군과 서군의 전투는 처음에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서군의 분열로 인해 전황은 점차 동군에게 유리해져갔다. 이윽고 서군의 패퇴가 굳어지자, 의홍은 적진을 정면 돌파하여 탈출하기로 결심하였다. 의홍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적진 돌파에 성공하였는데, 이 극적인 탈출극은 당시부터 널리 회자되어 무명(武名)을 떨쳤다. 2개월여의 잠복 기간을 거쳐 구주로 생환한 의홍은 덕천가강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가강과의 교섭에도 힘을 기울였다. 양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교섭은 난항을 거듭하였지만, 1602년 가강은 의홍과 도진씨를 사면하였다. 사면된 의홍은 만년에 향도(向島), 가치목(加治木) 등에 은거하였다. 1619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13명의 가신이 순사하였다.

의홍은 여타 구주 대명과 마찬가지로, 정유재란 때 조선 도공을 연행하여 영국(領國) 내에 정착토록 하였다. 의홍이 연행한 조선 도공들은 미산(美山)에 정착하여 사쓰마야키[薩摩燒]로 통칭되는 도자기를 생산해냈다. 조선 도공의 후예로 저명한 인물로는 도예가 심수관(沈壽官), 1945년 패전 당시 외무대신을 지낸 한국이름이 박무덕인 동향무덕(東鄕茂德) 등을 들 수 있다.

의홍은 정유재란 직후인 1599년, 아군 전사자와 적군 전사자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고야산(高野山)에 공양비를 세웠다. 사실 도진씨를 비롯하여 전국시대의 대명들은 전쟁을 치른 후에 곧잘 피아전사자공양을 거행하고는 하였다. 일본학계에서는 어령신앙(御靈信仰)의 일종으로 이러한 공양이 불교적 자비심, 박애정신의 발로에 다름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그 내역을 살펴보면 종교적 자비심이나 휴머니즘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의홍이 세운 공양비만 하더라도, 실제로 공양되고 있는 적군은 명군 전사자뿐이며 조선군 전사자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망각되고 있다. 의홍은 ‘대명(大明)’의 군대를 격파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도진씨가 벤 적군의 머릿수가 크게 부풀려져 있는 등, 고야산의 공양비에는 전공을 현창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 시대적 문맥과는 상관없이 고야산의 공양비를 비롯한 각종 피아전사자공양 사적들은 근대에 이르러 일본 고래의 ‘박애정신=적십자정신=문명’의 상징으로 강조되기에 이른다. 수길이 축조한 경도(京都)의 귀무덤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강조되었다.

묘소

녹아도시(鹿兒島市) 옛 복창사(福昌寺) 부지.

참고문헌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창비, 2013.
  • 이세연, 『사무라이의 정신세계와 불교』, 혜안, 2014.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 1995.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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