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자(沙屹者)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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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사흘자 |
한글표제 | 사흘자 |
한자표제 | 沙屹者 |
동의어 | 사흘리(沙屹里), 차하리(車河里) |
관련어 | 세폐(歲幣), 정명전(征明戰)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후금(청) |
왕대 | 조선/후금(청) |
집필자 | 이선애 |
성별 | 남 |
몰년/일 | 1636년 |
출신지 | 숙수후부([蘇克素護河], suksuhu) 부(部) |
관력 | 니루 어전([牛彔額眞=佐領], niru ejen), 구사 어전([固山額眞=都統], gusa ejen)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창슈([常書], cangšu), 형: 부하투([布哈圖], buhatu)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사흘자(沙屹者)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10년 10월 30일, 『인조실록』 10년 11월 15일 |
청초의 대신 차하라[cahara, 察哈喇]의 한자 이름.
개설
차하라는 후금(後金)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일찍이 니루 어전([牛彔額眞=佐領], niru ejen)이 되었고, 정홍기(正紅旗)의 대신을 지냈으며 이후 임시로 구사 어전([固山額眞=都統], gusa ejen)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629년과 1632년에 청 태종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를 따라 정명전(征明戰)에 참가하였고, 1635년에는 도도([多鐸], dodo)와 함께 명의 금주(錦州)를 공략하였다. 1632년에 바두리([巴都禮], baduri)와 함께 후금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하여 세폐(歲幣)의 액수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1636년 금주를 공략하고 돌아온 뒤 곧 사망하였다. 차하라는 차하리(車河里)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에는 사흘리(沙屹里)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가계
차하라는 고롤로([郭絡羅], gorolo)씨 창슈([常書], cangšu) 의 둘째 아들이었다. 창슈는 만주 숙수후부([蘇克素護河], suksuhu) 부(部)의 잔 강([沾河], jan ni bira) 부락의 추장이었다. 동생은 양슈([揚書], yangšu)였다. 창슈와 양슈 형제는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가 기병하자 그에게 귀부하였다. 이들은 귀부한 뒤에도 자신의 부민들로 구성된 니루의 어전이 되었고, 팔기(八旗)의 제도가 정해진 뒤에는 양황기(鑲黃旗)에 예속되었다가 곧 양백기(鑲白旗)에 속하게 되었다. 창슈 형제는 모두 누르하치의 생전에 사망하였고, 특히 양슈의 상에는 누르하치가 친림하였다. 창슈의 두 아들인 부하투([布哈圖], buhatu), 차라하는 모두 니루 어전으로 양백기에 예속되었다.
차하라의 아들은 풀락타([富喇克塔], fulakta)로 니루 어전, 도찰원 이사관(都察院理事官) 등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공부(工部)의 참정(參政), 몽골 정남기(正藍旗)의 머이런 어전([梅勒額眞], meiren i ejen)을 거쳐 구사 어전으로 발탁되었다. 입관 이후에는 이자성(李自成) 등을 소탕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차하라는 청 태종홍타이지가 1628년 8월 팔기의 어전과 국정을 담당하는 16대신, 군사적 업무[出兵駐防]를 담당하는 또 다른 16대신들을 각각 선발하였을 때, 탕구다이([湯古代], tanggūdai)와 함께 정홍기의 군사적 업무를 담당하는 관원이 되었다.
1629년 홍타이지를 따라 명을 공격하였을 때 준화(遵化)를 취하였고, 이듬해에 군대가 철수하자 범문정(范文程)과 함께 몽골군을 거느리고 준화를 지키다가 명군의 반격을 받아 철수하였다. 1632년 5월에는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할 때에는 선봉에 서기도 하였으며, 1635년 버일러 도도가 명의 금주를 공격할 때, 구사 어전아산(阿山, asan)과 함께 선봉이 명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1632년 10월 차하라는 바두리([巴都禮], baduri), 둥나미([董納密], dungnami)와 함께 조선에 사절로 가서 세폐의 액수를 논의하였다. 이때 차하라 일행은 봉황성(鳳凰城) 일대에서 접대를 명의 사신과 동등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돌아가겠다고 협박하는 것으로 조선을 압박하였다(『인조실록』 10년 10월 30일). 조선에서는 병마절도사가 직접 가서 타이르는 등 정성을 보였으며, 의주에서 한 차례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차하라·바두리 등은 세폐의 물목과 양을 정하는 데에서 조선 조정과의 합의를 도출해 내지 못하였고, 특히 금과 은·뿔 등 3가지 물목은 조선의 토산품이 아니라는 강한 항변을 듣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0년 11월 15일). 차하라 일행은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하고 귀국하였고, 홍타이지는 추신사(秋信使)박난영과 그가 가져온 예물을 물리쳐 보내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차하라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여 세폐에서 문제를 발생시킨 것은 결국 이후에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속잡록(續雜錄)』
- 홍선이, 「세폐·방물을 통해 본 조청관계의 특징」, 『한국사학보』 5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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