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의달(平義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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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江戶)시대 대마도의 제16대 도주.

개설

조선시대 조선과 일본 강호막부의 외교창구 역할을 담당한 대마도(對馬島)의 도주(島主)로, 1847년 대마번 제15대 도주 평의화(平義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862년 아버지가 은거하면서 뒤를 이어 도주가 되었다. 명치(明治) 신정부(新政府) 성립 후 초대 도주였다. 종의달(宗義達)이라고도 하였다.

활동 사항

1868년 3월 11일 대마도는 명치 신정부로부터 조선사무(朝鮮事務)를 담당할 것과 일본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에 통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윤4월 6일 평의달은 이 명령에 대한 답서와 함께 별지(別紙)를 첨부하여 대마도에 대한 명치 신정부의 원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12월 19일 사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명치 신정부가 성립되었다는 통고서를 제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무례하다는 이유로 서계를 받지 않으면서 교섭은 지체되었다. 1869년 명치 신정부가 천황(天皇)에게 영지(領地)와 영민(領民)을 되돌려 주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을 허가하고 번지사(藩知事)를 임명하였다. 평의달도 대마엄원번지사(對馬嚴原藩知事)가 되었다.

1869년(고종 6) 평의달이 조선에 보낸 서면 보고서에 평(平) 자 아래에 조신(朝臣)이라는 두 글자를 쓴 일이 이전에 없던 일이므로 격식을 갖추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다(『고종실록』 6년 12월 13일). 평의달이 번주가 아니라 명치 신정부의 관리인 번지사가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1871년에는 지방통치기관을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폐번치현(廢藩置縣) 이후 평의달은 외무대승(外務大丞)이 되어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 때까지 조선과의 외교를 관장하였다.

상훈 및 추모

1884 백작(伯爵)이 되었고, 1901년 5월 25일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장기현(長崎縣) 하현군(下縣郡) 엄원정(嚴原町)의 만송원(万松院).

참고문헌

  • 현명철, 『19세기 후반의 대마주와 한일관계』, 국학자료원, 2003.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