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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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영주.

개설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은 전국시대 서일본의 대영주 모리원취(毛利元就)의 3남으로 아명은 덕수환(德壽丸)이며, 우사랑(又四郎)·좌위문좌(左衛門佐)로 불리고 후에는 축전재상(筑前宰相)으로 통칭되었다. 관위는 종3위 권중납언(權中納言)까지 올랐다.

1541년 죽원(竹原) 소조천씨(小早川氏)의 당주 소조천흥경(小早川興景)이 후사 없이 죽자 소조천씨의 가신들은 모리원취에게 그의 3남 덕수환에게 소조천씨의 뒤를 잇게끔 청했다. 여기에 대내의륭(大內義隆)의 강력한 권유도 있어 원취가 승낙했다. 덕수환은 의륭의 ‘융’ 자를 따 융경(隆景)이라 하고 소조천씨의 양자가 되어 1544년 죽원 소조천씨의 당주가 되었다. 1550년 소조천씨의 본가인 소전(沼田) 소조천가 정평(正平)의 딸을 정실로 맞아 소전 소조천가의 상속자 지위도 얻어 두 소조천가는 통합되었다. 이후 융경은 소전 소조천씨의 본거지인 고산성(高山城)에 입성했지만 1552년에는 그 근처에 성을 신축하고 본거로 삼았다.

내용 및 특징

이후 융경은 길천씨(吉川氏)의 당주가 된 친형 원춘(元春)과 함께 모리씨의 일원으로서 모리씨가 서일본의 대영주로 성장하는 데 힘써 이를 두고 흔히 모리양천(毛利兩川)이라고 불린다. 융경의 소조천씨는 정강한 수군(水軍)으로서 각종 전공을 세웠고 수군의 특성을 반영해 정보·공작 방면에서도 활약했다. 1582년 직장신장(織田信長)의 사망 시 융경은 모리씨를 공격 중이던 풍신수길(豊臣秀吉)과의 화의를 주장했고 이 공으로 수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수길의 통일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워 그 보상으로 영지를 크게 확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시에는 6번 대의 주장(主將)으로 1만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의 저항으로 공략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 명이 원군을 파견해 평양성을 탈환하자 그 대응을 위해 경기도로 옮겨 배치하였다. 그 직후 1593년 1월 한양을 목표로 남진하던 명군을 벽제관에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병에 걸려 윤9월 일본으로 귀국했고 1595년에는 가독을 양자 수추(秀秋)에게 물려주었다. 2년 뒤인 1597년 6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융경은 임진왜란 시 일본군 내에서도 수길의 특별한 신뢰를 받아 수길은 융경의 주진 이외에는 믿지 않았다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풍신 정권의 중신인 5대로(大老)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풍신수길로부터 풍신(豊臣)·우시(羽柴)의 성씨를 하사받기도 했다.

활동 사항

소조천융경에게 맡겨진 임무는 전라도 지역의 공략이었다. 1592년 7월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서계에 ‘융경을 전라도로 보냈다.’는 문구가 있다(『선조실록』 25년 7월 1일). 그러나 융경은 조선군과 의병들에 의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라도의 전황을 전하는 『선조실록』의 기사에는 융경의 이름이 나타나지않는데, 이는 일본군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기 힘들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 후 융경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같은 해 11월 전황 보고의 내용 가운데 왜군 장수의 이름과 배비 상태에 대한 정보에서이다. 이에 의하면 융경은 개성부로 옮겨 배치되었다(『선조실록』 25년 11월 11일). 이것은 남진하던 명군을 막기 위한 대비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사이의 상황은 1594년 투항한 왜인이 ‘소조천(小早川)’ 및 ‘모리요원(毛利耀元)’에 대해 전한 내용으로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소조천은 군사를 거느리고 호남을 침범하였다가 고산(高山)·금산(錦山)에서 패전당한 뒤에 개성(開城)에 머물렀다.”고 하고 있다(『선조실록』 27년 11월 11일). 융경의 패전은 1592년 권율(權慄)의 이치(梨峙) 전투나 의병장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이 활약한 금산 전투 등의 사실과 대응한다.

한편, 1596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황신(黃愼)이 조선으로 돌아와 일본의 상황을 보고했는데, 다시 전쟁이 발생하면 ‘소조천융경의 양자인 금오(金吾)가 대장이 될 것이다.’라는 소문을 전하고 있다(『선조실록』 29년 12월 21일). 여기서 ‘금오’는 융경의 양자인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를 말한다. 융경과 금오에 관련한 기사는 이전에도 보이는데(『선조실록』 28년 4월 19일), 이곳에서는 ‘소한천(小旱川)’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日本歷史叢書), 吉川弘文館, 1995.
  • 新人物往來社, 『小早川隆景のすべて』, 新人物往來社, 1997.
  • 戰國人名辭典編集委員会, 『戰國人名辞典』, 吉川弘文館, 2005.
  • 中野 等, 『文祿·慶長の役』(戰爭の日本史16), 吉川弘文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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