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의진(平義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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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江戶)시대 중기의 대마번(對馬藩) 번주.

개설

조선에 사신을 보냈던 일본의 여러 통교자들은 자신들의 명의에 본성(本姓)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과 통교 시 대마도의 종(宗)씨는 보통 본인들의 이름에 종씨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종의진(宗義眞)의 조부인 종의지(宗義智)부터 본성인 평(平)을 사용하였고 그 후 역대 대마 번주는 조선과 통교 시에는 평씨를 사용하였다.

종의진은 1639년 대마번 2대 번주(藩主)인 종의성(宗義成)의 장남으로 강호(江戶)에서 태어났다. 유명은 언만(彦滿), 1655년 종4위 하파마수(下播磨守)가 되었다. 1657년 부친의 사망으로 12월 27일 가독을 이어받았고 같은 날 시종(侍從) 대마수(對馬守)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대마번주가 된 초기에는 부친이 만년에 등용한 상인 출신의 대포권대부(大浦權大夫: 광우(光友))를 계속 기용해 번정(藩政)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를 관문(寬文)의 개혁이라고 한다. 권대부의 개혁은 1660년 영내의 토지조사를 시작으로 지방지행제의 폐지 등 녹봉제 개혁, 균전제도의 실시 등 토지제도의 개혁, 공사부역에 대한 은납제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이런 급진적 개혁의 반발로 1664년 권대부는 실각하고 사형에 처해지지만, 그 후에도 개혁의 기본 노선은 계승되어 번정 개혁이 이어졌다. 또한 1665년 종씨 문중의 개편과 5인조의 편성으로 농민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1667년부터는 권농정책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문의 개혁은 상당 부분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개혁의 성과와 더불어 부친 의성(義成) 때부터의 은광산 개발이 성공하고 조선무역이 호황을 누려 대마번은 일본 서국 제일의 부자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런 성과로 인하여 의진은 ‘중흥(中興) 영주(英主)’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대마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운하인 대선월뢰호(大船越瀨戶)를 개착해 1612년 준공하고 1678년 부산 왜관을 초량으로 이전하는 등 토목공사를 벌였다. 1685년에는 번교(藩校)를 설립해 우삼방주(雨森芳洲)·송포하소(松浦霞沼) 등 우수한 학자를 초빙하는 등 문교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는 방만한 재정 운영과 조선 무역의 저조 등으로 재정 은산의 쇠퇴, 무역의 저조기미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692년 가독을 차남 의윤(義倫)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지만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은거 이후 의진은 형부대보(刑部大輔)로 칭하였다. 그런데 1694년 의윤이 급사하자 4남 의방(義方)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번주로 세웠다. 의방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막부는 의진에게 조선 관계를 관장하도록 명령해 1701년까지 담당하였다. 그 기간 중 안용복(安龍福) 등의 울릉도 도항으로 발단이 된 울릉도·독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1696년 왜인의 도항금지로 일단락되었다. 1702년 8월 7일 대마도 부중(府中)에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평의진(宗義眞)’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제일 처음 나오는 것은 1647년(인조 25)으로 ‘대마도주 평의진’으로 되어 있다(『인조실록』 25년 10월 9일). 그러나 이때의 도주는 의진의 부친인 의성이며, 이 기사를 제외하고는 그 이후의 기사에서는 대마도주가 ‘평의성(平義成)’으로 되어 있다. 또한 1657년(효종 8)의 기사에 평의성이 강호에서 죽고 그의 아들 평의진이 뒤를 이었다는 부분(『효종실록』 8년 10월 26일)도 있는 만큼 1647년의 기록은 의성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의진이 부친을 계승한 초기의 조선에서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다. 먼저 대마도 내에서 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있었던 듯, 평의진이 강호에서 자라 두 나라가 잘 지내는 의리를 모르고 또 나이가 어려 처사가 몹시 급하므로 섬 사람들이 모두 겁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조선 측에 전해졌다(『효종실록』 9년 11월 17일). 또한 조선에서 파견된 역관도 의진의 인간성이나 그의 통치에 대해서 부정적인 내용을 보고하였다. 먼저 의진에 대해서 그가 아비를 추모하는 뜻은 조금도 없이 조선에서 보낸 선물을 진열해 놓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고 했는데, 효를 중시하는 조선의 측면에서 이와 같은 의진의 모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의 통치문제에 대해서는 도주가 연소하고 일을 주관하는 왜인 우두머리는 모두 늙었으며, 나머지 연소한 자들인데 모두 도주의 측근이며, 따라서 대마도의 일이 날로 혼란해져간다고 평가하였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6월 2일).

의진의 대마도 통치 기간 중 조선과의 교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왜관(倭館)이전 문제였다. 당시 왜관은 부산 두모포에 있었는데, 의진은 가독을 계승한 초부터 왜관의 이전을 조선에 요청하였다(『효종실록』 10년 3월 7일).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의진은 계속 왜관이전을 요청하였다. 거듭된 요구에 조선도 마침내 1673년(현종 14) 초량(草梁)으로의 이전을 허락하였고(『현종실록』 14년 10월 19일). 왜관건립 공사 후 1678년(숙종 4)부터 초량의 왜관이 사용되게 되었다.

참고로 종의방(宗義方)이 대마번주가 된 이후 의진이 조선으로 보낸 서계에는 자신을 ‘대마주태수(對馬州太守)’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도주(島主)인 의방과의 차별화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조선에서는 여전히 의진을 도주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문헌

  • 다시로 가즈이, 『왜관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 2005.
  • 동북아역사재단, 『한일 관계속의 왜관』, 경인문화사, 2012.
  • 민덕기,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7.
  •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근세』, 경인문화사, 2006.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永留久恵, 『武門の興亡と對馬の交隣(對馬國志 第2卷 中世·近世偏)』, 對馬國志刊行委員會,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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