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재(源義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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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막부 10대 장군.

개설

족리의직(足利義稙)이다. 실정막부의 장군인 족리씨는 조선과 통교 시에는 본성인 원(源)을 사용하였다. 의재(義材)는 초명으로 이후 이름을 의윤(義尹)으로 바꾸었다가 1513년부터 의직(義稙)이라고 하였다. 장군 재직 기간이 두 시기로 나뉘는데 처음은 1490년 7월부터 1493년 1월까지, 두 번째는 1508년 7월부터 1522년 1월까지였다.

의재는 8대 장군 족리의정(足利義政)의 친동생인 족리의시(足利義視)의 아들이다. 1489년 9대 장군 족리의상(足利義尚)이 육각(六角)씨 정벌전 도중에 진중에서 병사하자 은거 생활 중이던 의정과 의정의 정실이자 의상의 모친인 일야부자(日野富子) 등의(등에게) 지지를 얻어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1490년 장군 대리로 정무에 복귀하였던 의정이 사망하자 7월 10대 장군에 올랐다.

내용 및 특징

초기에는 부친인 의시가 보좌하였으나 의시가 사망한 뒤에는 전임 장군 의상의 유지를 이어 육각 정벌을 재개하여 이를 평정하고 하내(河內)로 출진하는 등 군사 활동을 강행하였다. 이는 결국 장군권의 강화로 비쳐져 관령 세천정원(細川政元)과 대립하게 되었다. 정원은 의재를 싫어하게 된 일야부자와 모의하여 1493년 의재의 장군직을 박탈하고 유폐한 뒤 새로운 장군을 세웠다. 의재는 그 후 탈출하여 결국 주방(周防)의 대내의흥(大內義興)에게 의탁하며 재기를 모색하게 되었다.

1507년 세천정원이 암살된 뒤 그 후계자를 둘러싸고 세천씨가 내분에 빠졌다. 이에 대내의흥은 의재를 옹립해 경도(京都)를 향해 출진, 1508년 7월 11대 장군 족리의징(足利義澄) 세력을 경도에서 몰아내고 장군으로 복귀하였다. 장군직에 복귀하며 경도 탈환에 힘을 더한 세천고국(細川高國)을 관령에 임명해 대내씨와 세천씨의 힘의 균형 위에서 장군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전횡은 막을 수 없었고 특히 대내의흥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세천고국과의 대립이 심해져 1521년 경도에서 도망쳤고 장군직은 고국에 의하여 폐해졌다. 그 뒤 재기를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1523년 객사하였다.

활동 사항

의재는 장군에 오른 다음 해인 1491년(성종 22)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장군직 계승을 전하고 이전의 다른 조선국왕사들처럼 대장경 수여를 요청하였다(『성종실록』 22년 8월 4일). 그 뒤 원의재의 명의로 조선에 사신이 파견된 것은 1494년(성종 25)으로 이때에도 대장경을 요청하였다(『성종실록』 25년 4월 10일). 1494년은 의재가 장군의 자리에서 쫓겨난 뒤였다. 의재의 장군 재임 시에는 이외에도 이름이 적시되지 않은 ‘일본국왕’의 사신이 파견되어 왔다. 주의해야 할 것은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가 그 전후시기에 확인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 무렵 명과 일본(막부)의 공식무역인 감합무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던 것이 대내씨·세천씨였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橋本 雄, 『中世日本の國際關係―東アジア通交圈と僞使問題』, 吉川弘文館,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田端泰子, 『足利義政と日野富子―夫婦で担った室町將軍家』, 山川出版社, 2011.
  • 민덕기,「실정막부(室町幕府)의 대명조공(對明朝貢) 중재요청과 조선의 대응」, 『일본역사연구』 1, 일본사학회, 1995.
  • 신동규, 「<조선왕조실록> 속의 일본국왕사와 위사」, 『왜구 위사 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국왕사의 조선통교」,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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