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충(吳惟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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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무장.

개설

명 말기의 장수로서 척계광이 모집한 의오군으로 활동하며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몽골 방어를 위한 계주(薊州)의 성보(城堡) 수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시에는 이여송이 이끄는 부대 소속으로 평양 전투에 참여했고, 정유재란 때에는 충주(忠州)에 주둔하면서 영남을 오가며 일본군 공격에 힘썼다.

가계

활동 사항

가정 연간 동남 연해에 왜구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척계광을 따라 토벌에 참여했다. 척계광은 『기효신서』를 저술하는 한편 원앙진(鴛鴦陣) 전법을 만들어 의오군을 훈련시켰다. 이후 오유충 등의 의오군들은 척계광을 따라 태주(台州) 등지의 왜구 토벌에 참여했고 절강이 평정되자 척계광을 따라 광동의 왜구 토벌에 참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67년(명 융경 1) 몽골이 산서 내지까지 침략해 들어오자 척계광이 명을 받아 계주에 가게 되었는데 오유충 역시 그를 따라 계주로 가서 성보·관채(關寨)의 수축에 참여하였다. 그는 성 수축에 공이 있음이 인정되어 유격(遊擊)으로 승진하였고 1577년에 산해로(山海路)의 참장이 되었다. 1583년 척계광이 광동(廣東)에 파견되자 오유충 등도 그를 따라갔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그해 7월 명에서 파견된 요동의 유격사유(史儒)와 요동부총병(遼東副摠兵)조승훈(祖承訓)이 평양에 왔으나 일본군에 대패하고 달아났다. 명나라에서는 송응창(宋應昌)에게 경략을 맡기고 섬서총병(陝西總兵)이여송(李如松)을 제독으로 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이때 오유충도 누대유(樓大有)·호대수(胡大受) 등과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오유충은 보병 4천 명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선조실록』 25년 12월 14일).

오유충은 계진(薊鎭)의 참장으로서 절강의 병사 3천여 명을 통솔하여 이여송의 절제를 받아 평양성 탈환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평양성은 지형이 험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지세로 일본군 2천여 명이 모란봉(牡丹峰) 정상에 주둔하여 지키고 있었고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제1군 1만 6천여 명은 화승총을 갖추고 있었다. 제독이여송은 유격오유충과 호대수에게 병사를 이끌고 모란봉을 공격하게 하고 다른 군대들은 각각 나누어 공성하게 하였다. 1월 8일 새벽 이여송이 각 부대에 발포 공성을 명하자 전군이 성의 각 방면에서 공성을 시작하였다. 유격오유충은 모란봉을 공격하다가 가슴에 탄환을 맞아 부상을 당했지만 계속 병사들을 독려하여 절강의 병사들이 가장 용맹하게 돌격하여 모란봉을 차지했다. 당시 일본군은 토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였으나 화공으로 공격하여 마침내 소서행장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이후 오유충의 군대는 대구 등지에 머물다가 경주(慶州) 안강(安康)에서 일본군과 싸워 패하였는데 당시 이여송이 이 패배를 남병의 죄로 돌려 오유충을 파직하였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선조실록』 27년 1월 18일). 1594년 정월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병부 상서 형개(邢玠)가 제독이 되어 요동·선대·대동·산동·섬서 등 각지의 병사들과 복건 절강의 수군을 차출하였는데 오유충은 흠차비왜중익부총병(欽差備倭中翼副摠兵)원임도독첨사(原任都督僉事)로서 보병 3,990명을 이끌고 6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명나라 군대는 4로(路)로 나누어 진군하였는데 오유충의 군대는 참장 양등산(楊登山)·도사 설호신(薛虎臣)·참장 왕국동(王國棟)·유격 진잠(陳蠶)·섭사충(葉思忠)·진인(陳寅)·파귀(頗貴)·총병 해생(解生)·유격 진우문(陳愚聞)·팽신고(彭信古) 등이 거느리는 군대와 함께 마귀(麻貴)의 절제를 받았다. 정유재란 당시 오유충의 군대는 충주에 주둔하였으며 영남을 왕래하면서 적을 토벌하였다.

1599년 좌군도독부도독첨사로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노환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응천(應天) 군문의 표장(標將)으로 명받았지만 사양하였다.

학문과 사상

저술 및 작품

묘소

상훈 및 추모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윤형(尹炯)은 1597년에 부총병오유충을 따라 관동 지방으로 나갔다. 오유충은 사대부를 예우하였으므로 서로 친하게 교유하여 윤형은 그를 위해 「오부총동정비문(吳副摠東征碑文)」을 지었다.

참고문헌

  • 『기언별집(記言別集)』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명사(明史)』
  •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 『산해관지(山海關志)』
  • 『영평부지(永平府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