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자룡(鄧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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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시기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무장.

개설

등자룡(鄧子龍)의 자는 무교(武橋)이고 호는 대천(大千)이다. 강서(江西) 풍성(豐城) 사람이다. 별호는 호관도인(虎冠道人)이다. 복건·광동 연해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소교(小校)에서 파총(把總)의 지위까지 올랐다. 뒤에 강서·광동 등지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의 진압에도 참여했다. 만력 연간에 수차례 봉기와 병변(兵變)을 평정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1585년 미얀마[緬甸] 군이 운남(雲南) 지역을 공격해 들어오자 반지화(攀枝花)에서 미얀마 군대를 격파하여 부총병(副總兵)에 임명되었다. 뒤에 군영을 다스림에 공정함을 잃고 반란을 야기한 죄로 관직을 잃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파견되었다가 노량해전 중에 전사했다(『선조실록』 31년 12월 21일).

활동 사항

1558년에 무과거(武科擧)에 급제했다. 뒤에 강서에 도적이 일어나자 토벌에 참여하였다. 이후 전공을 쌓아 광동파총으로 승진하였다. 만력 연간에 등자룡은 장원훈(張元勳)을 따라 산적을 평정하였는데 그중 도적 수괴 하나를 생포하여 다시 수비(守備)로 승진하였다. 이후 다시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의 직을 대리하며 절강의 도사직을 월권하였다. 당시 이 일로 관직을 삭탈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만력제는 죄를 면해주었다. 마침 마양(麻陽)에서 난이 일어나자 토벌하라는 만력제의 명을 받고 난을 해산시켰다.

1585년 2월 미얀마의 목방부(木邦部)가 운남을 침벌해오자 만력제는 등자룡을 영창(永昌)에 주둔하게 했다. 등자룡은 반지화에서 미얀마 군대와 격렬히 전투하여 미얀마 군을 격퇴했으며, 적의 소굴까지 추격하여 수장들을 생포한 공로로 부총병으로 발탁되었다.

미얀마의 공격을 받은 이후 영창(永昌)·등충(騰沖)의 두 곳에서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 신병으로 등충영과 요안영이 조성되었는데 미얀마 군 토벌에 공이 있었던 유정(劉綎)이 등충영을 지휘하고 등자룡은 요안영을 관할했다. 결과적으로 등자룡과 유정은 서로 불복하여 두 진영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만력제는 두 장수가 공을 많이 세웠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았다. 뒤에 유정이 파면당하여 등충영을 유천봉(劉天俸)이 관할하게 되었으나 그 역시 체포되어 등자룡이 두 개 병영을 모두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등자룡이 자신의 충복들이 있는 요안영을 편애하여 고된 일을 등충영 측에 미루고 배급을 부당하게 하자 등충영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매우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성을 함락하고 약탈을 거듭하였다. 결국 순무가 토착인들과 한족들을 조발하여 평정하였다. 얼마 안 되어 등자룡이 이 일로 관직을 빼앗기고 옥에 갇혔다.

1590년에 사개(思箇)가 반란을 일으키자 순무(巡撫)오정(吳定)이 황제에게 등자룡에게 죄를 대신하여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주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이후 오정의 지휘 아래 등자룡이 반란군을 토벌하여 그 전공으로 원래의 직위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는 다시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1598년 등자룡은 원래의 직위를 회복하고 수군을 이끌고 진린(陳璘)을 따라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등자룡은 노량해전에 참전해 2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러나 등자룡의 선박에 불이 붙었고, 이 틈을 노린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서법에 능하고 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풍수설(風水說)』, 『진법직지(陣法直指)』, 『횡과집(橫戈集)』 등을 남겼다.

묘소

등자룡의 집안이 대대로 거주한 지역인 풍성시(豐城市) 두시진(杜市鎮) 무계(茂溪) 등가촌(鄧家村) 앞에 그의 묘소가 있다. 그의 묘소는 강서성과 풍성시(豐城市)의 중점문물보호단위(重點文物保護單位)로 보호되고 있다.

상훈 및 추모

등자룡 사후 명 조정은 그를 도독첨사(都督僉使)로 추증하였고 그의 아들 하나에게 관직을 세습하게 했다. 조선에서는 탄보묘(誕報廟)에서 등자룡을 배향했다. 본래 탄보묘는 관우(關羽)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에 세워졌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병인 수군도독진린과 부총병등자룡이 이 섬에서 관우의 위패를 모시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였다. 그 후 진린, 등자룡, 이순신의 위패가 함께 배향되었고, 1763년(숙종 39)에 어필로써 ‘탄보묘’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탄보묘로 불렸다(『정조실록』 16년 8월 19일).

참고문헌

  • 『난중일기(亂中日記)』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명사(明史)』
  • 이민웅, 「조·명 연합함대의 형성과 노량해전 경과」,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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