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일(張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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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조선 교구 신부로, 1866년(고종 3) 병인사옥 때 처형당한 프랑스인 선교사.

개설

장경일(張敬一)은 베르뇌(Berneux Simeon)의 한자식 표기이다. 1814년 프랑스 샤르트(Sarthe) 주의 샤토 뒤 루와(Château du Loir)에서 출생한 베르뇌는 르망 교구의 소신학교와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837년 5월 30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39년 7월 15일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39년 11월 28일에 베르뇌는 선교지 출발을 명받았으며, 1840년 1월 15일에 파리를 출발해서 6월 25일에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1841년에 통킹으로 가는 도중에 베트남에서 체포되어서 사형 언도를 받지만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요청으로 1843년 3월에 석방되었다.

1842년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베르뇌는 그해 10월에 만주 주교로 임명되어서 만주로 이동하였다. 1849년에 요동 지역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실시되자, 상하이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1854년(철종 5) 8월 5일에 교황 비오 9세가 베르뇌를 페레올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베르뇌는 2명의 신부와 함께 조선인 천주교인 홍봉주의 안내를 받아서 1856년(철종 7)에 서울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머무는 동안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충청도 제천의 배론에 신학생 양성을 위한 신학당을 설립하였으며, 각종 교회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 1866년(고종 3)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면서 그해 2월 23일에 베르뇌는 조선 관헌에 체포되었으며, 3월 7일에 참수 당하였다.

활동 사항

베르뇌는 1857년(철종 8)에 조선 교구 최초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해서 기도서를 개편하였으며,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신부의 부주교 성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장주교 제우윤시서」를 발표해서 조선 교회의 법규와 제도를 정리하였다. 한편 충청도 제천의 배론에 신학당을 설치해서 조선인 신학생 양성을 추진하였다.

1864년(고종 1)에 국경에 러시아 상인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흥선대원군은 베르뇌 주교를 통해서 프랑스가 러시아를 물리쳐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는 흥선대원군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정하였으며,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를 체포해서 의금부에 가두었다(『고종실록』 3년 1월 16일). 조선 정부는 베르뇌 주교에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4월 7일에 새남터(현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한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참수하였다.

묘소

참수형이 집행된 3일 뒤인 4월 10일에 천주교인들이 베르뇌 주교의 시신을 용산의 왜고개[瓦署峴]에 묻었다. 1899년 10월 30일에 뮈텔 주교는 베르뇌 주교 등의 시신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하였으며, 1900년 9월 4일에 명동성당으로 옮겼다. 시복을 앞둔 1968년 5월에는 베르뇌 주교 유해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절두산성당의 순교성지로 옮겨져 현재까지 안치되어 있다.

상훈 및 추모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추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추대

참고문헌

  •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하, 가톨릭출판사, 2013.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저, 『한국 가톨릭 대사전』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 『파리외방전교회 아카이브』, Numéro : 455, Siméon BERNEUX, http://archives.mepasie.org/notices/notices-biographiques/berneu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