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正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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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安土桃山)~강호(江戶) 시대의 무장·대명(大名).

개설

부친과 함께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신종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외교사절로 활약하였다.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는 덕천가강(德川家康)을 위시한 동군의 일원으로 활약하여 당진번(唐津藩)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가계

후대의 편찬 사료에 따르면, 사택씨(寺澤氏)는 기씨(紀氏) 일족으로 본래 미농국(美濃國) 출신이라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정성과 부친 광정(廣政) 이전에 눈에 띄는 족적을 남긴 인물은 없다. 정성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충청(忠晴)은 정성에 앞서 1622년 요절하였다. 충청을 대신하여 동생 견고(堅高)가 가독을 이어 당진(唐津)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1647년 견고는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 자살하였다. 이에 대명으로서의 사택씨는 대가 끊겼다.

활동 사항

정성과 부친 광정은 본래 직전신장(織田信長)의 수하였다. 그러나 1582년 신장이 본능사(本能寺)에서 전사하자, 신장의 뒤를 이은 수길에게 신종하였다. 조선 침공의 지휘본부인 명호옥성(名護屋城)의 축조에 참가하였으나, 조선에 건너가지는 않고 명호옥성에 머물렀다. 그러나 1595년 수길의 지시에 따라 명의 강화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갔으며, 이듬해 명의 사절 심유경을 동반하여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같은 해 말에는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부산으로 건너와 조선 왕자를 일본에 보내라는 뜻을 조선 조정에 전달하였다. 조선·명과의 교섭에 임하는 정성의 동향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다수 확인된다(『선조실록』 29년 6월 12일)(『선조실록』 29년 12월 7일). 정성은 정유재란 때에도 명호옥과 부산 간의 연락책을 맡았다.

수길 사후에는 덕천가강에 신종하여, 1600년의 회진(會津) 진공에 참가하였으며, 곧이어 발발한 관원 전투에서도 선봉을 맡았다. 전공을 인정받아 도합 12만 석의 대명으로 성장하였다.

정성은 1594년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당시 정성은 이른바 남만무역(南蠻貿易)의 거점이었던 장기(長崎)를 총괄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정성의 개종으로 인해 장기에서의 기독교 포교가 원활해질 것으로 낙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도로서의 정성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 차원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자 정성은 개종을 번복하였던 것이다. 1597년에는, 훗날 ‘26인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일본인 기독교도 26인이 다름 아닌 장기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한편, 정성의 뒤를 이은 견고는 1637년 영지 내에서 발생한 기독교도들의 대규모 반란, 즉 도원(島原)의 난의 책임을 지고 막부의 감봉 조치를 감수해야 했는데, 견고의 자살은 이 감봉 조치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성의 사적으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무지개 솔밭[虹の松原]’으로 불리는 방풍림(防風林)의 조성이다. 1593년 당진 번주에 임명된 이래, 정성은 당진만(唐津灣)에 새로이 토지를 개간할 요량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를 벌목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금령을 내리는 등, 정성은 솔밭 조성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616년의 토지대장에 솔밭 뒤편으로 경작지가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성은 살아생전에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지개 솔밭’은 현재 일본 3대 솔밭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묘소

좌하현(佐賀縣) 당진시(唐津市) 경신사(鏡神社) 내

참고문헌

  • 국립진주박물관 편, 오만·장원철 옮김,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부키, 2003.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歷史地名大系』, 平凡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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