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질이(何叱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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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해서여진 울라부의 마지막 버일러[beile, 貝勒] 부잔타이[bujantai, 布占泰].

개설

하질이는 하질귀(何叱貴)로도 나타나는데, ‘질(叱)’은 ‘스’의 이두자이고, ‘이(耳)’는 ‘귀’를 훈독한 것이다. 이는 하스후([哈薩虎], hashū) 버일러([貝勒], beile)로 불린 부잔타이를 뜻한다. ‘후’를 ‘귀’로 기재한 것은 ‘ㄱ’, ‘ㅋ’, ‘ㅎ’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만주어(여진어)의 특성에 기인한다. 부잔타이는 울라나라([烏喇納喇], ulanara)씨로 울라부의 마지막 버일러였다. 울라는 오늘날의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중부에 위치한 송화강(松花江)의 지류 후란하(呼蘭河)에서 비롯된 ‘훌룬([扈倫, 呼倫], hūlun) 정통을 이어받은 부족이다. 조선이나 명에서는 이를 홀라온(忽剌溫) 혹은 홀온(忽溫)이라고 표기하였다. 15세기 말~16세기 초 훌룬은 사실상 무너졌고 이때 여러 갈래로 남하한 훌룬은 울라([烏喇], ula)·하다([哈達], hada)·여허([葉赫], yehe)·호이파([輝發], hoifa) 등 4부족으로 정립되었다. 부잔타이는 울라국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군주였다.

부잔타이는 1593년 여진과 몽골의 9부족이 연합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眞)을 공격하였던 전투에서 울라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참전하였다가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는 4년 가까이 부잔타이를 억류하였다. 울라의 버일러 만타이([滿泰], mantai)가 죽자 방면되어 울라의 버일러가 되었다. 부잔타이는 슈르가치의 두 딸과 누르하치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사위가 되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형인 만타이의 딸을 누르하치와 슈르가치에게 주는 등 겹사돈을 맺었다. 그러나 이후에 누르하치를 배신하고 지속적으로 여허와의 연계를 통한 세력 회복을 시도하였다.

부잔타이는 지속적으로 두만강 유역의 여진 번호(藩胡)들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고, 조선을 침공하기도 하였다. 부잔타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여 누르하치와 여러 번 갈등을 겪었고, 1607년에는 조선 종성(鍾城) 부근에서 결정적인 패전을 하였다. 부잔타이는 1613년 누르하치가 울라부를 복속시킬 때 탈출하여 여허로 갔다가 1618년에 사망하였다.

가계

부잔타이는 훌룬 시조 나치불루([納齊卜祿], nacibulu)의 후손이다. 그의 고조는 구더이 주얀([古對朱顔], gudei juyan), 증조는 타이란([太蘭], tairan)이다. 타이란의 아들은 울라부를 건설한 부얀([布顔], buyan)이며, 그는 부잔타이의 할아버지이다. 부얀은 부간([布干], bugan), 복도([博克多], bokdo) 등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부잔타이는 부얀의 장남인 부간의 셋째 아들이었다.

부잔타이는 25세 때 여허의 버일러 부자이([布齋], bujai)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그 밖에 누르하치의 딸인 무쿠시([穆庫什], mukusi), 슈르가치([舒爾哈齊], šurgaci)의 딸인 어시타이([額實泰], esitai)와 온저( [娥恩哲], onje) 등을 아내로 두었다. 부잔타이는 자신의 장인인 슈르가치에게 여동생 후나이(hunai)를 시집보냈고, 누르하치에게는 형 만타이의 딸 아바하이([阿巴海], abahai)를 시집보냈다. 아바하이는 누르하치의 네 번째 부인으로 이후 아지거([阿濟格], ajige), 도르곤([多爾袞], dorgon), 도도([多鐸], dodo) 등을 낳았고 효열무황후(孝烈武皇后)로 추존되는 인물이다.

부잔타이는 8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다르한([達爾漢, 打拉哈], darhan)이며 그의 후손들은 만주 정백기(正白旗)에 예속되어 청초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둘째 아들인 달라무([達拉穆], dalamu)는 울라 도성이 건주여진에 함락될 때 자살하였으나 그의 후손들 역시 청으로 귀부하여 공적을 세웠다. 부잔타이의 아들 8명 가운데 셋째 아들 아라무([阿拉木], aramu), 넷째 아들 바얀([巴顔], bayan), 다섯째 아들 부얀타([布顔托], buyanta) 등은 온저의 소생이고, 여섯째와 여덟 번째 아들은 어시타이의 소생이었다. 이 중 어시타이의 막내아들 홍광(洪匡)은 울라국이 멸망할 때 어머니가 자살한 이후 원한을 품었다. 누르하치는 홍광이 어시타이의 딸이라는 이유로 그를 버일러로 삼고 또 자신의 장자 추연([褚英], cuyen)의 딸과 혼인시키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나 홍광은 이후 울라인들의 지지를 받아 반기를 들었고 울라성이 재차 누르하치에 의하여 점령되자 북쪽으로 달아났다가 28살의 나이로 자살하였다.

활동 사항

부잔타이는 1568년 울라에서 부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타이지([太吉], taiji)가 되었고 18세가 되던 1585년에 아버지 부간이 죽고 형 만타이가 계승한 뒤 버일러([貝勒], beile)가 되어 특히 군사 문제를 장악하였다. 1588년 형 만타이의 지시를 받고 수완([蘇完], suwan)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는데, 수완부의 추장 솔고([索爾果], solgo)와 솔고의 아들 피옹돈([費英東], fiongdon)이 건주여진으로 귀부하기도 하였다. 1589년 여허의 군대가 호이파부를 포위하자 호이파 추장 바인다리([拜音達里], baindari)는 만타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만타이는 이를 받아들여 동생 부잔타이를 파견하여 호이파의 포위를 풀게 하였다. 울라부는 1590년 이후로 크게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부잔타이는 동해 여진에 대한 공략을 주도하였다. 부잔타이는 1593년 여허의 주도로 여진과 몽골의 9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하였을 때에도 울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참전하였고, 이 전투에서 패전한 뒤 포로가 되어 4년 동안 건주여진에 억류되었다(『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부잔타이는 1596년 자신의 형인 울라의 군주 만타이가 죽임을 당한 뒤 방면되어 누르하치의 지원 아래 울라의 버일러가 되었다. 1597년에는 부잔타이가 주축이 되어 여허와 하다, 호이파 등 훌룬의 4부족이 모두 건주여진에 사절을 보내어 화친을 하였다. 부잔타이는 이듬해에도 건주여진을 방문하여 화호를 다졌다. 부잔타이는 1599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기를 꾀하여 동해 여진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대부분의 동해여진 부족들이 울라 부에 복속하게 되었고 1602년을 전후하여 울라의 세력이 동해안까지 미치게 되었다.

부잔타이의 세력 확장은 두만강(豆滿江) 유역부터 그 동쪽의 동해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조선과도 충돌하게 되었다. 1603년 여름 부잔타이의 군대는 두만강 안팎의 번호 부락까지도 공략하였고 이 과정에서 종성(鍾城), 동관진(潼關鎭) 등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선조수정실록』 36년 8월 1일). 그해 10~12월에는 부잔타이가 직접 나서서 온성(穩城)과 경원(慶源) 일대의 여러 번호 부락은 물론 조선의 진(鎭)과 보(堡)를 공격하여 조선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선조실록』 36년 12월 22일). 1605년 3월 부잔타이의 군대는 마침내 종성의 동관진을 함락하고 첨사전백옥(全伯玉)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선조실록』 38년 3월 23일). 조선 조정에서는 울라군의 중간 거점인 건퇴(件退)를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대패를 당하였다(『선조실록』 38년 5월 22일).

부잔타이는 조선의 변경을 공격하는 동시에 관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교역을 통해서 확장된 세력을 부양하기 위한 조처였다. 조선은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서 부잔타이에게 2차례에 걸쳐 직첩을 주었고, 그의 부하들에게 지급할 100장의 직첩을 추가로 발급하였다. 조선은 이를 통하여 100명 이상의 포로를 송환받을 수 있었고, 군비를 갖출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었다(『선조실록』 39년 5월 9일). 부잔타이는 조선과 강화함으로써 직첩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량의 녹봉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역을 할 수 있는 계기도 얻을 수 있었다. 부잔타이는 조선과 교역을 하면서도 1607년까지 두만강 유역의 번호 부락에 대한 공략을 계속하면서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부잔타이는 1605년에 한([汗], han)을 칭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두만강 일대의 여진 세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강대해졌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부잔타이의 세력은 1607년 그가 두만강 여진 부락의 관속권을 두고 건주여진과 벌인 대결에서 크게 패하면서 다시 약화되었다(『선조수정실록』 40년 2월 1일)(『선조실록』 40년 3월 28일). 이때 울라군 10,000 가운데 7,000여 명이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잔타이의 숙부인 복도 부자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부잔타이의 세력은 이전보다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듬해인 1608년에는 재차 누르하치에게 화친을 요청하였다.

부잔타이는 이후 누르하치와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과 화친을 반복하였다. 누르하치 역시 부잔타이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였다. 부잔타이는 건주여진과 화친을 하면서도 조선과의 교섭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등 배후에서는 세력의 확장을 꾀하였다. 부잔타이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던 누르하치는 1612년 겨울 울라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고, 한 차례 부잔타이의 화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이듬해 1월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울라를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복속시켰다. 부잔타이는 여허로 도주하였고 1618년 여허의 호이파 공격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몇 개월 뒤 병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청태조실록(淸太祖實錄)』
  • 『만주실록(滿洲實錄)』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북로기략(北路紀略)』
  • 『북관지(北關誌)』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연구』, 경인문화사, 2014.
  • 서병국, 『선조시대 여직 교섭사 연구』, 교문사, 1970.
  • 조동승, 『포점태전』, 길림문사출판사, 2005.
  • 김주원, 「여진족 추장 하질이(何叱耳)의 실록상 이표기에 대하여」, 『인문논총』 64,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0.
  • 장정수, 「선조대 대여진 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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