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합적(小兒哈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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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누르하치의 동모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슈르가치([愛新覺羅 舒爾哈齊], aisin gioro šurgaci)의 한자 이름.

개설

슈르가치는 아이신기오로 탁시([塔克世], taksi)의 셋째 아들로 누르하치의 친동생이다. 일찍이 형을 도와 건주여진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누르하치와 마찬가지로 명의 관직을 받았으며 요동총병이성량(李成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성격이 굳세고 용맹하여 전투에 능하였다고 일컬어진다. 1587년 누르하치는 허투알라([赫圖阿拉], hetu ala)에서 한(汗)을 칭하고, 슈르가치를 버일러로 봉하였는데 2인자로서 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건주여진을 분열시킨다 하여 형에 의하여 유폐되었다가 1611년 죽었다. 1653년 순치제(順治帝)는 그를 호쇼이[和碩] 장친왕(莊親王)에 봉하였다. 조선에서는 슈르가치를 속아합치(速兒哈赤)·소라치(小羅赤)·소을가치(小乙可赤) 등으로도 표기하고 있으며, ‘소(小)’에 추장이라는 의미로 ‘추(酋)’를 붙여 소추(小酋)라고도 기록하였다.

가계

슈르가치는 탁시와 선황후(宣皇后)로 추존된 히타라(喜塔喇, [hitara]) 사이에서 태어났다.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의 친동생으로 탁시의 셋째 아들이었다. 동모 동생으로 야르하치([雅爾哈齊], yargaci)가 있었고 이복동생으로는 무르하치([穆爾哈齊], murhaci), 바야라([巴雅喇], bayara) 등이 있었다. 부인은 적처 퉁기야([佟甲/佟佳], tunggiya)씨 외에 10명이었다.

그의 아들은 장자인 아이퉁가([阿爾通阿], aitungga) 등 1609년에 누르하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두 아들 외에, 둘째 아민([阿敏], amin)과 여섯째 아들 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 등 9명이 있었다. 딸로는 울라([烏拉], ula)의 버일러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에게 시집간 장녀 어시타이([額實泰], esitai) 등 12명이 있었다.

활동 사항

슈르가치는 5세가 되던 1569년 생모를 잃고 계비 나라씨의 홀대를 받았다. 이에 형인 누르하치를 따라 분가하여 오랫동안 고생을 하였다. 이 시기에 누르하치 형제는 장사를 통해서 생계를 이어갔고, 외조부인 건주우위(建州右衛) 왕고(王杲)에 의하여 길러졌다.

1574년 명의 요동총병이성량이 왕고를 공격하였을 때 슈르가치는 누르하치와 함께 포로가 되었고, 이후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다. 1583년에 슈르가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와 아버지 탁시가 난전 중에 전사하자, 이성량은 그 대가로 두 형제에게 금은과 칙서 등을 주어 보상하였다. 슈르가치 형제는 이른바 ‘13벌의 갑옷’으로 기병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원인을 제공한 니칸 와일란을 살해하고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슈르가치는 형 누르하치와 함께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인근의 장백산부를 장악하면서 세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슈르가치는 1595년과 1597년에 직접 명의 수도 북경(北京)에 가서 조공하고 관직을 받는 등 비교적 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이 시기에 슈르가치는 울라부 버일러 부잔타이의 여동생을 처로 맞이하고,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내는 등 겹사돈을 맺어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이 시기까지 슈르가치는 형 누르하치와 같은 성에 머물면서 아래의 지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수직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 시기에 건주여진을 방문한 조선의 통사 하세국은 누르하치와는 별도로 슈르가치와 교섭을 벌였고(『선조실록』 28년 11월 20일), 이듬해에 파견된 조선 사절 신충일(申忠一)도 누르하치와 슈르가치의 환대를 별도로 받았으며(『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1596년 3월에 건주여진을 방문한 명의 차관 여희원도 누르하치와 슈르가치로부터 별도의 대접을 받았다(『선조실록』 29년 3월 17일).

슈르가치는 점차 부잔타이, 몽골 세력과 혼인을 통하여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어갔다. 1603년 부잔타이의 군대가 두만강 유역에 나타나 종성(鍾城) 일대를 약탈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슈르가치와 부잔타이의 관계를 들어 울라와 건주여진이 연합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6년 9월 3일).

1607년 두만강 훈춘 일대의 여진 부락이 부잔타이의 지배를 거부하고 건주여진으로 귀부할 때 누르하치는 이들을 거두기 위한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부잔타이의 군대와 마주쳤다. 슈르가치는 이때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였으나, 누르하치의 두 아들인 추연([褚英], cuyen)과 다이샨([代善], daišan) 등이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 울라의 1만(10,000)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와 슈르가치의 관계에는 다소의 틈이 발생하였다. 누르하치는 슈르가치의 추종 세력을 처단하였는데, 슈르가치 또한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누르하치는 그에게 벌로 100냥의 상금을 거두었고, 그의 군권을 박탈하여 세력을 약화시켰다.

슈르가치는 누르하치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독자적인 행보를 걷고자 하여 자신의 큰아들 아이퉁가 등과 더불어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부잔타이 등과 세력을 합쳐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슈르가치와 누르하치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고, 이성량이 이 기회를 활용하여 건주여진을 제어하고자 함으로써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성량은 명 조정에 상주하여 슈르가치를 건주우위의 수령으로 임명하자고 건의하였다. 누르하치는 1609년 3월 자신을 죽이려고 한 아이퉁가 등 슈르가치의 두 아들을 죽이고, 둘째 아들 아민도 죽이려 하였다. 홍타이지 등이 만류함으로써 아민은 죽음을 면하였지만 슈르가치는 쇠사슬에 묶인 채 유폐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1611년 8월 슈르가치는 수금 중인 상황에서 죽었으니 향년 48세였다.

묘소

슈르가치는 사후 오늘날 요녕성(遼寧省)의 신빈현(新賓縣)에 있는 영릉(永陵)에 묻혔다가 1624년 요양(遼陽)의 동경릉(東京陵)으로 이장되었다.

상훈 및 추모

1652년 슈르가치의 여섯 번째 아들 지르갈랑이 숙부 호쇼이[和碩] 우전[和碩鄭] 친왕(親王)으로 봉해졌다. 순치제는 지르갈랑에 대한 예우로 그의 아버지인 슈르가치를 호쇼이 친왕(親王)에 봉하고 ‘장(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슈르가치는 호쇼이 장친왕(莊親王)이라는 봉호를 가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陳永祥, 「舒爾哈齊死因考」, 『滿族硏究』, 2009년 2기.
  • 刁書仁, 「舒爾哈齊史事考實」, 『雲南師範大學學報』, 2009년 3기.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