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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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영주.

개설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는 비전(備前) 강산성(岡山城) 성주 우희다직가(宇喜多直家)의 아들이다. 유명은 어복(於福). 팔랑(八郎), 가씨(家氏)라고 칭했는데 후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이름을 따 수가(秀家)로 개명했다. 통칭은 비전재상(備前宰相)이다. 1581년 수가가 9세 때 부친 직가가 사망했는데, 수길의 알선으로 1582년 직전신장(織田信長)에게 영지상속을 인정받았다. 1582년 비중(備中) 고송성(高松城)을 수길이 공격할 때 1만여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해, 강화가 성립된 후 수길로부터 50여 만 석의 영지를 인정받았다. 이후 수길의 총애를 받았는데, 1586년에는 수길의 양녀가 된 전전이가(前田利家)의 딸과 결혼했다. 수길의 전국통일을 위한 원정에 대부분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고 관위도 그에 따라 높아져 1594년에는 권중납언(權中納言)에 올랐다.

내용 및 특징

1592년 임진왜란 시에는 일본 원정군의 총대장으로 출진하여, 한성에 입성한 뒤 경기도의 평정을 담당했다.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진하던 명군을 벽제관에서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등과 격퇴하여 이 공으로 참의(參議)에서 권중납언(權中納言)으로 승진했다. 2월 행주대첩 시에는 병력에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지만 6월에는 진주성 공략에 성공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시에는 감군(監軍)으로 참가해 좌군(左軍)을 이끌고 전라도 공략에 나서 남원·전주를 점령하고 순천에 왜성을 축성했다. 1598년 일본으로 돌아가 수길로부터 5대로(大老)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해 8월 수길이 죽고 그의 유언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했다.

수길의 사후 수길의 유자인 풍신수뢰(豊臣秀頼)를 보좌하며 풍신씨 정권유지를 위해 힘썼다. 그러나 1600년 관원(關原)의 싸움에서 덕천가강(德川家康)에 맞서 서군의 주축으로 출전했지만, 서군은 대패하고 수가는 살마(薩摩)의 도진씨(島津氏)를 의탁해 도피하는 몸이 되었다. 그 후 사형은 면했으나 약 50년간의 유폐·유형 생활 끝에 1655년 유형지인 팔장도(八丈島)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활동 사항

우희다씨(宇喜多氏)의 선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우희다씨 자신은 백제왕손이나 일본 무사의 양대 성씨인 평(平)을 주로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희다수가라는 이름도 보이지만 보통은 평수가(平秀家)로 적고 있다. 풍신수길도 보통 평수길(平秀吉)로 적었는데, 수가는 1587년 수길로부터 풍신(豊臣)의 성과 우시씨(羽柴氏)를 하사받았다. 이후 수가는 이 성씨들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우시비전재상(羽柴備前宰相) 평수가(平秀家)’라는 호칭이 『선조실록』에도 보인다(『선조실록』 25년 11월 11일). 이 기사에서는 수가가 ‘대장(大將)’으로 경성에 있다고 쓰고 있는데, 수가의 직책에 대해서는 대총병(大摠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선조실록』 26년 7월 10일). 아울러 실록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그 안에다 겹으로 담장을 치고 그 가운데는 누(樓)를 지어놓았다. 우리 백성들을 모두 목책 밖으로 내보내고서 자기 무리들만 살고 있다.”며 한양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선조실록』 25년 11월 11일).

수가가 처음 한양에 입성했을 때와 관련해 재미있는 기사가 있다. 왜군이 한양에 입성했을 때 궁궐이 모두 불타서 수가가 처음 거처로 정한 곳은 종묘(宗廟)였다. 그런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왜군을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해, 수가가 어쩔 수 없이 남별궁(南別宮)으로 진을 옮겼다는 것이다(『선조실록』 25년 5월 3일). 같은 내용이 『선조수정실록』에도 보이는데 수가가 두려워해서 종묘를 불태웠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한편, 임진왜란 시 일본군 내부에서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대표로 하는 무단파(武斷派)와 석전삼성(石田三成)·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주도하는 문치파(文治派) 사이의 갈등이 커졌는데, 이것은 후에 풍신씨 정권을 양분하고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593년 진주성 공격 시에 그런 양상을 일부 볼 수 있는데, 가등청정이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공격에 나선 반면, 수가·행장·삼성·길계(吉繼) 등은 가지 않았다(『선조실록』 26년 7월 16일). 울산성 전투 당시에도 전선축소론을 내세웠다.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 때 청정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동군(東軍)에 속했고 수가 등 4명은 서군(西軍)의 핵심세력이었다.

이 관원의 싸움과 관련해 비교적 소상한 전후 사정을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조선 조정에 보고했다(『선조실록』 34년 4월 25일). 그런데 실제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는데, 이 보고에서는 수가가 전사했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立石定夫, 『戰國宇喜多一族』, 新人物往來社, 1988.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日本歷史叢書), 吉川弘文館, 1995.
  • 戰國人名辭典編集委員會, 『戰國人名辭典』, 吉川弘文館, 2005.
  • 中野 等, 『文祿·慶長の役』(戰爭の日本史16), 吉川弘文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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