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행장(小西行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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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번 부대를 이끌고 조선에 가장 먼저 상륙한 후 한성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진출하였던 일본군 지휘관.

개설

소서행장은 일본 구주(九州) 웅본 지역의 대명(大名)이다. 임진왜란 때 제1군의 선봉으로 참전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 기간 동안 강화교섭을 주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 내에서 벌어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 패한 후 경도(京都) 강가에서 참수되었다.

활동 사항

1558년 오사카 만에 면해 있는 도시 계(堺, [사카이]) 출신인 소서입좌의 2남으로 경도(京都)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는 자신이 스스로 밝힌 나이를 통해 추정한 것이다(『선조실록』 28년 2월 10일). 그의 가문은 상인인 일비옥씨(日比屋氏)와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유하던 해상운송로와 자금력을 토대로 풍신수길(豊臣秀吉) 정권 내에서 정치적 지위를 높이고 있었다. 또한 그의 가족은 모두 기독교에 귀의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우희다씨(宇喜多氏) 아래에서 일하다가 1580년 무렵부터 풍신수길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가문의 특색을 이어받아 해상교통과 선박과 관련한 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586년 풍신수길이 구주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 군량 수송과 함께 풍신수길에 협조적이었던 구주의 영주들과의 중개를 담당하면서 정권 내 입지를 높였다. 1588년 풍신수길은 구주 비후(肥後) 지역을 둘로 나누어 소서행장과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영지로 주었다. 한편, 1587년 구주 공격이 완료될 무렵, 풍신수길은 대마도의 종씨(宗氏)에게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소서행장은 풍신수길의 명령을 종씨에게 전달하고 조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 사이는 가까워졌고, 1589년에는 행장의 딸과 종의지(宗義智)가 혼인하였다. 1590년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오자 그들을 경도까지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소서행장과 종의지는 함께 조선과의 교섭에 임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에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종의지 등과 함께 제1군에 속하여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조선으로 건너왔다. 1군은 4월 12일 대마도를 출발하여 4월 13일 조선에 접근하였으며 이튿날 전 병력이 조선에 상륙하여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를 치렀다(『선조실록』 25년 4월 13일)(『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이후 상주, 충주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후 5월 2일경 동대문을 통해 한성에 들어갔다.

소서행장은 조선군과 전투를 치르는 한편으로 조선인 통역사 등을 사로잡아 조선 조정에 보내어 교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이를 때까지 조선과 접촉하는 데는 실패했다(『선조실록』 25년 7월 1일)(『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일본군들은 한성에 모여 이후의 전투 방향에 대해 상의하였다. 소서행장은 평안도를 택하였는데, 이는 조선 또는 명과 교섭을 통해 전쟁을 유리하게 마무리하고 이를 자신의 공적으로 삼고자 해서였다.

6월 초, 조선 조정이 머무르는 평양성에 이른 그는 조선에 교섭을 요구했고, 대동강에서 조선 측과 만나 회담하였다. 소서행장이 이 회담에 직접 참가한 것은 아니다. 조선은 명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회담은 결렬되었다(『선조실록』 25년 6월 9일). 소서행장은 6월 중순 조선 조정이 물러난 평양에 입성하였다.

7월 17일 명에서 파견한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때 일본군은 길어진 보급로, 군량 부족, 조선의 의병활동 때문에 전의를 상당히 상실한 상태였다. 더구나 명의 구원을 목격하게 되자 강화교섭을 원하는 여론이 발생했다. 마침 명에서는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교섭을 시도하였고, 소서행장은 이 교섭에 일본 측 상대로서 임하였다. 소서행장은 이전까지 조선에 제시했던 강화조건을 바꾸어 명에 대한 일본의 조공을 요구했다(『선조실록』 25년 9월 8일).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의 대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다시 공격하였고, 이 전투에서 참패한 소서행장은 한성까지 퇴각하였다. 그러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패배한 후 일본군과 명군 모두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강화교섭이 재개되었다. 교섭은 다시 소서행장과 심유경이 담당하게 되었다.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한성에서 조선 남부 해안으로 퇴각하면서 본격적인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소서행장은 강화교섭을 주관하면서 그 상황을 풍신수길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전달받아 실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조선과 일본을 수차례 오가며 교섭에 임했다. 풍신수길의 7개 조건[七件事]과 명 조정의 강화 조건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조율 가능한 조건이었으며, 실제로 풍신수길의 조건은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점차 변하고 있었다.

그는 교섭 중에 자신의 가신 소서비(小西飛)를 항복 사절로 꾸며 명 조정에 보냈으며, 명 조정은 풍신수길이 책봉과 조공을 바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책봉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강화교섭 기간 중에는 창원 진해의 웅천왜성에 주둔했다. 교섭 중에는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 장수들에게 수길의 명령을 전달하고, 장수들의 의견을 수합·보고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1594년 11월에는 조선의 장수 김응서와 만나 강화교섭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1596년 9월 풍신수길이 강화교섭 결렬을 선언하였다. 소서행장은 귀환하는 명의 책봉사, 조선의 통신사와 동행하면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조언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12월 21일). 그러나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그의 제안, 곧 수길의 조건은 조선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소서행장은 정유재란이 시작되는 1597년 7월까지 조·명과 교섭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등청정이 조선으로 다시 건너오는 날을 조선에 알려준다거나(『선조실록』 30년 1월 19일), 요시라(要時羅)를 통해 재침 시 일본의 작전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등의 언행을 보이기도 했다(『선조실록』 30년 6월 14일).

정유재란 때에는 가등청정과 함께 공동으로 선봉에 서게 되었다. 1597년 8월부터 시작된 내륙 공격에 참여하여 남원, 전주를 거쳐 충청도까지 북상한 후 정읍으로 돌아왔다. 정읍에서 벌어진 회의에서 자신의 주둔지로 순천을 택했다. 12월, 완성된 순천왜성에 입성한 후 전쟁 종결 때까지 주둔했다. 그가 다른 일본군의 주둔지와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순천을 택한 것은 독자적으로 강화교섭을 진행하려는 의도였다는 설명도 있다.

그는 1598년 9월, 순천왜성에서 대치하던 명군 장수 유정(劉綎)과 교섭을 시도했다. 유정은 소서행장을 유인하여 사로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유정은 순천왜성 공략에도 실패하였다. 8월 18일, 풍신수길이 사망하였고, 10월 1일에 일본군 진영에 철수 명령이 도착했다. 8일에는 순천에도 명령이 전해졌다. 강화교섭은 곧 철수교섭으로 전환했다. 소서행장과 유정은 인질을 교환하고 일본군의 안전 철수를 보장하기로 했다. 이순신은 소서행장의 철수를 저지하였다. 소서행장은 종의지와 도진의홍(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가 11월 18일~19일의 노량해전이다(『선조실록』 31년 11월 27일). 순천왜성을 탈출한 소서행장은 부산에 도착하여 25일 일본으로 출발하여 12월 11일 구주 박다(博多)에 도착했다.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이들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여러 영주들은 석전삼성(石田三成), 소서행장과 같은 이른바 문치파와 가등청정, 복도정칙(福島正則) 등의 무단파로 갈라졌고 이는 관원 전투로 이어졌다.

1600년 1월 중순 소서행장은 비후의 영지에서 경도·대판(大坂) 지역으로 상경하였다. 곧 관원 전투를 위한 모의에 참여했다. 그는 석전삼성, 도진의홍,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와 함께 서군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9월 15일 벌어진 관원 전투에서 서군이 패한 후 도망쳤으나 죽중중문(竹中重門)에게 사로잡혀, 10월 1일 경도 육조(六条) 하원(河原)에서 석전삼성, 안국사(安國寺) 혜경(惠瓊)과 함께 처형되었다. 비후 지역에 머물던 가등청정은 소서행장이 부재한 영지를 침공하였고 전투 종결 후 자신의 영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서행장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풍신수길에 의해 등용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소서행장의 제1목표는 풍신수길 정권의 발전과 안정 및 자신의 지위 향상에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도 그러한 배경하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그의 배경은 약화되었고 관원 전투를 통한 전세 역전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묘소

일본 기부현(岐阜縣) 선동사(禪幢寺) : 가묘

명천사(明泉寺) : 소서행장의 머리를 매장하였다는 설이 있음

참고문헌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島津亮二, 『小西行長「抹殺」されたキリシタン大名の実像』, 八木書店, 2010.
  • 宇土市敎育委員會, 『宇土市史硏究第26號 小西行長基礎資料集』, 2005.
  • 中野等, 『秀吉の軍令と大陸侵略』, 吉川弘文館, 2006.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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