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문(陳愚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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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무장.

개설

별호는 소산(少山)이다. 집안이 대대로 음직으로 무관직을 받았다. 진우문도 음직으로 파총(把總)을 지냈으나 1579년에 연수(延綏) 유격(遊擊)에 임명되었고 1582년 고산(孤山)·준화(遵化) 등지에서 참장(參將)을 지냈다. 1597년 10월에 조선에 와서 정유재란에 참전하였다.

가계

선조는 남직예(南直隸) 서성(舒城) 사람이다. 고조부의 휘는 곡가(穀加)로 섬서(陝西) 가주(葭州)로 이주하였다. 아들 자수(子秀)를 두었고 그 아들 봉(鳳)이 진우문의 조부이다. 봉은 관직이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고 대동총병(大同總兵)으로 임직하여 정서장군(征西將軍)의 직을 받았으나 전사하였다. 이 공로로 그의 조부는 포충(褒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선조실록』 31년 2월 2일). 그 아버지 수인(守仁) 역시 음직으로 무직에 올라 총병이 되었고 소용장군(昭勇將軍)에 봉해졌다.

활동 사항

진우문은 도지휘첨사로서 마병(馬兵) 1,490인을 이끌고 정유년 10월에 조선에 왔다. 당시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던 동생 진우충(陳愚衷)이 전주를 지키다가 남원이 적의 손에 떨어지자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진우충은 남원을 구원하라는 군명도 어겼고 남원이 적의 손에 떨어지자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참수형이 내려졌다. 진우문은 동생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동생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진우문은 동생의 죄를 면제받기 위해 이후 더욱 분전하여 도산(島山: 현 울산) 전투에서 선봉으로 동남쪽을 맡아 지키다가 가정(家丁), 즉 공식 군사가 아닌 사적으로 소유한 병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직접 적을 무찔렀으며 또 대포와 화전(火箭)을 쏘아 적선을 부수었다. 경리(經理)양호(楊鎬)는 그의 용맹함을 표창하면서, 험한 성의 북쪽 지역을 맡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진우문이 먼저 목책 속으로 들어가며 가정에게 섣불리 진격하지 말라고 경계했으나,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아 얼마 뒤에 적탄에 맞고 말았다. 군사들에게 업혀서 돌아왔는데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1598년 계진연하로참장(薊鎭燕河路參將)으로 승진했다가 다시 1604년 연수동협(延綏東協)의 부총병이 되었다.

묘소

진우문 부부의 묘소가 유림시(榆林市) 유양구(榆陽區) 원남교(原南郊)에서 발견되었다. 묘에서 출토된 묘지(墓誌)는 현재 유림시 유양구 문관회(文管會)에 있다.

상훈 및 추모

1605년 재임 중에 사망하여 용호장군(龍虎將軍)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명사(明史)』
  •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 代鋒, 「榆林市出土明陳愚聞夫婦墓志考釋」, 『西部考古』, 西北大學文化遺產學院,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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