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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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 대한 반란군을 이끌고 명을 세워 원을 무너뜨린 인물.

개설

태조고황제의 이름은 주원장(朱元璋)이다. 주원장은 1328년(천력 원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변에 있던 황각사(皇覺寺)에 의탁해 승려가 되었다. 이후 반란군의 지도자 곽자흥에게 의탁하였다. 능력을 인정받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면서 2인자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곽자흥이 사망한 이후 주원장이 대신해서 반란군 세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오국공(吳國公)에 취임하였다. 그는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진우량(陳友諒)·장사성(張士誠) 등과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였다. 주원장은 마침내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1366년(정평 26) 명왕(明王)에 올랐다. 1368년에는 남경에서 황제에 등극하면서 명을 건국하였다. 연호는 홍무(洪武)로 정하였다.

활동 사항

명 건국 후 홍무제는 서달(徐達)·상우춘(常遇春) 등의 장수와 대군을 편성해 북벌을 단행하였다. 북벌군은 승리를 거듭하였고 1368년 8월 명군은 북경에 입성하였다. 원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順帝)토곤테무르[妥歡帖木兒]는 북벌군을 피하여 내몽골로 도망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의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 이후 다른 지역은 스스로 투항해서 마침내 중국이 다시 통일되었다.

황제에 등극하였던 주원장, 즉 홍무제는 모든 정무를 모두 직접 처리하고자 하였다. 주변의 신료들을 신뢰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이들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며 부정을 저지를까 우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새벽에 일어나 집무를 시작해서 깊은 밤에 이를 때까지 공문을 읽으며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상소문이 길어지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건의의 격식을 법제화하였다.

홍무제는 특히 준엄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以猛治國]고 주장하면서 재판, 투옥, 특무, 형벌 등을 직접 관장하면서 신료와 백성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리고 후계자의 권력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공신 세력을 대거 숙청하였다. 역전의 용사였던 서달은 물론 초대 승상이었던 이선장(李善長) 등도 호유용(胡惟庸)의 반란 사건에 연루시켜 처형하였다. 당시 호유용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15,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남옥(藍玉)의 옥사 사건으로 15,000에서 20,000에 달하는 사람이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후계자의 권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수의 사람이 죽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수의 개국공신과 원로들을 제거하였던 것은 도리어 다음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선은 홍무제가 재위에 있는 동안 사대 관계를 강조하며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여진 지역과 요동 지역 등에 관련된 활동으로 홍무제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특히 명에서는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表箋文)에 희롱하고 모독하는 내용의 문구가 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외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5년 2월 9일). 표전문 사건은 홍무제가 조선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설명할 수 있다.

홍무제는 즉위와 동시에 장남 주표(朱標)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주표는 40세의 나이로 홍무제보다 먼저 사망하고 말았다. 황태자 주표는 성품이 훌륭하였고, 오랜 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유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받던 인물이었다. 홍무제는 50세 이후에는 대부분의 정사를 황태자에게 처리하도록 조치하였다.

홍무제 역시 황태자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보다 먼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당시 홍무제의 나이는 65세였는데, 심한 충격을 받아 몸이 쇠약해지고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황태자가 사망하자 다른 아들들을 제외하고 주표의 아들 주윤문(朱允炆)을 황태자로 새로 책봉하였다. 당시 주윤문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하였다. 그가 곧 건문제(建文帝)이다. 그러나 건문제는 홍무제의 사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연왕(燕王)주체(朱棣)와의 전쟁에서 패해 제위를 잃게 되었다. 홍무제가 너무 많은 공신과 원로들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건문제는 연왕과의 전쟁에서 믿고 지휘를 맡길 만한 장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연왕이 바로 영락제(永樂帝)이다. 홍무제는 1398년(홍무 31, 태조 7)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의 기록에서 홍무제를 태조고황제로 처음 지칭하였던 것은 명에서 그의 부음(訃音)을 전달하였을 때였다. 당시 명에서는 홍무제의 죽음을 전달하는 별도의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지 않았다. 의주만호(義州萬戶)이귀철(李龜鐵)이 명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통해서 조선 조정에 홍무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전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사에서 처음으로 ‘태조고황제’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태조실록』 7년 12월 22일).

참고문헌

  •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 『명통감(明通鑑)』
  • 『명사(明史)』
  • 『원사(元史)』
  • 『대명회전(大明會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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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순동, 『명조성립사연구』, 개신,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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