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징(吳大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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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활동하였던 한인(漢人) 출신 관료이자 학자.

개설

오대징은 30대의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여 1870년대, 1880년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직후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참가하였으나 전투 패배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복귀하지 못하였다. 퇴직 이후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였으며, 청나라 말기 고문자(古文字) 및 금석문(金石文)의 대가이자 예서(篆書)에 능한 서예가로 유명하였다.

활동 사항

오대징의 본명은 오대순(吳大淳)이었는데, 1861년 동치제(同治帝)의 휘(諱) 재순(載淳)을 피하기 위하여 개칭하였다. 1868년 진사(進仕)에 급제한 뒤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 섬감학정(陝甘學政), 하남 하북도(河南河北道), 태부시(太仆寺) 경(卿), 좌부도어사(左副都御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섬감학정으로 재직 시 조정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희태후(慈禧太后)의 원명원(圓明園) 중건 명령에 대하여 중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직한 성격이었다.

1884년 흠차회판북양사의(欽差會辦北洋事宜)에 임명되어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이홍장(李鴻章)과 함께 수도 북경(北京) 및 청의 북부 지역 안보를 책임지게 되었다. 같은 해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이홍장은 오대징과 4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고(『고종실록』 21년 11월 16일), 오대징은 한 달 넘게 조선에 체류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조사, 조선 정부 및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진행하였다(『고종실록』 21년 12월 24일).

1880년 처음 길림(吉林)에 파견된 오대징은 길림장군(吉林將軍)과 함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황무지 개간, 이민(移民) 정책 등을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85년에는 청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이 지방에 재차 파견되어 러시아와 동부 지역 국경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훈춘(琿春)의 흑정자(黑頂子) 지방을 회수하고, 두만강(豆滿江)에 출입하는 중국 선박이 러시아 측의 저지를 받지 않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1886년 광동순무(廣東巡撫), 1888년 하도총독(河道總督), 1892년 호남순무(湖南巡撫) 등의 중책을 거쳤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자청하여 30,000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으나, 일본군에게 빼앗긴 요동(遼東) 해성(海城) 지역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영원히 관직에 임용하지 않는다는 ‘혁직영부서용(革職永不敍用)’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는 평소 소장하던 서화 및 골동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 1902년 사망하였다. 그는 금석문에 관한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예서체에 능한 서예가로도 유명하였다.

저술 및 작품

『각재시문집(恪齋詩文集)』·『각재집고록(恪齋集古錄)』·『고옥도고(古玉圖考)』·『고자설(古字說)』·『권형도량시험고(權衡度量試驗考)』·『길림감계기(吉林勘界記)』·『설문고주보(說文古籀補)』·『십육금부재인존(十六金符齋印存)』·『자설(字說)』·『긍헌소견소장길금록(恆軒所見所藏吉金錄)』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권혁수,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 김형종, 「오대징과 1880년대 청·러 동부국경감계」, 『중국근현대사연구』 6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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