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왕(攝政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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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섭정왕 |
한글표제 | 섭정왕 |
한자표제 | 攝政王 |
관련어 |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병자호란(丙子胡亂), 소현세자(昭顯世子)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조선/후금~청 |
왕대 | 조선/후금~청 |
집필자 | 이선애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의황제성종(義皇帝成宗)·예충친왕(睿忠親王) |
성별 | 남 |
생년/일 | 1612년 |
몰년/일 | 1650년 |
출신지 | 건주여진(만주) |
관력 | 타이지(台吉), 버일러(貝勒), 장이부사(掌吏部事), 친왕(親王)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 모: 울라나라([烏喇納喇], ula nara)씨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섭정왕(攝政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1년 3월 25일, 『인조실록』 15년 1월 22일, 『인조실록』 15년 2월 8일, 『인조실록』 22년 1월 20일, 『인조실록』 22년 5월 7일, 『인조실록』 22년 5월 7일, 『인조실록』 22년 5월 23일, 『인조실록』 22년 12월 4일, 『효종실록』 1년 10월 4일, 『효종실록』 1년 12월 9일, 『효종실록』 2년 2월 11일, 『효종실록』 2년 3월 17일 |
청 태조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인 도르곤([多爾袞], dorgon)의 한자 표기명 중 하나.
개설
도르곤은 후금 건국 이후에 본격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전공을 세워 1636년 호쇼이[和碩] 예친왕(睿親王)으로 봉해졌다. 도르곤은 병자호란에서 좌익군을 이끌고 많은 전공을 많이 세웠고 강화도 공격을 주도하였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과도 인연이 깊었다. 도르곤은 입관(入關) 직전 금주(錦州)를 중심으로 전개된 명과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입관 당시에 이자성(李自成)의 군대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청 태종이 죽자 순치제(順治帝)를 옹립하여 섭정왕이 되고 이후, 황부(皇父)로서 정치를 독단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권력을 바탕으로 생모인 울라나라([烏喇納喇], ula nara)씨를 황후로 추존하였으며, 1650년에 사망한 뒤에는 순치제에 의하여 황제로 추존되었다. 도르곤은 사후에 순치제에 의하여 묘호(廟號)와 시호(諡號)를 모두 추탈당하였다가 이후 건륭제에 의하여 친왕(親王)으로 복권되었다.
가계
도르곤은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의 14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암바 푸진([福金; 大妃], amba Fujin) 울라나라([烏喇納喇], ula nara)씨 아바하이([阿巴亥], abahai)였다. 아지거([阿濟格], ajige)의 동복동생이자, 도도([多鐸], dodo)의 동복형이었다. 경효충공의황후(敬孝忠恭義皇后)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처를 두었고, 그중 2명은 조선인이었다. 조선 여인 중에는 국혼(國婚) 차원에서 이루어진 종실 금림군(錦林君)이개윤(李愷胤)의 딸인 의순공주(義順公主)도 있었다(『효종실록』 1년 3월 25일). 그러나 도르곤은 아들을 두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의 친동생인 도도의 5번째 아들 도르보([多爾博], dorbo)를 입적시켜 예친왕(睿親王)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활동 사항
도르곤은 아버지인 누르하치와 이복형 홍타이지의 치세에 많은 공을 세웠다. 청의 태조누르하치는 그의 후계자로 도르곤을 염두에 두었다고도 하며, 태종홍타이지 역시 그를 중용하였다. 도르곤은 정백기(正白旗)의 수장으로 명과 몽골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도르곤은 청 태종을 수행하여 돌로트부[多羅特部]를 공략한 공으로 1628년 머르건 다이칭([墨爾根戴靑], mergen daicing)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구왕(九王)이라고도 일컬어졌으며, 1636년 홍타이지가 제위에 올라 대청(大淸)을 수립하게 되자 호쇼이 예친왕으로 봉해졌다.
1636년 도르곤은 만주와 몽골의 좌익군을 창성(昌城)을 통하여 조선을 침공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가 다시 강화도 공격을 주도하여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인조실록』 15년 1월 22일). 도르곤은 조선의 포로들을 이끌고 귀환하였고, 이를 계기로 소현세자·봉림대군 등과도 인연을 맺었다(『인조실록』 15년 2월 8일).
1638년에는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산동 일대를 공략하여 40여 개의 도시와 성을 함락하고 수많은 노획을 가지고 이듬해에 귀환하였다. 1640년부터는 금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명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도르곤은 이 시기에 세운 많은 전공을 바탕으로 발언권이 높아졌다. 1643년 청 태종홍타이지가 죽자, 청의 집권자들은 그의 장자인 호오거([豪格], hooge)와 도르곤을 두고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으나, 결국 그 절충안으로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인 푸린([福臨], fulin)을 순치제로 옹립하였다. 도르곤은 호쇼이[和碩] 정친왕(鄭親王)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과 함께 좌우 섭정왕(攝政王)으로서 당시 여섯 살에 불과하였던 황제를 보필하여 국사를 전관하였다(『인조실록』 22년 1월 20일). 이때 도르곤은 병권을, 지르갈랑은 국내 사무를 관장하는 등 권력을 나누었으나, 곧 지르갈랑이 조정의 의결권을 도르곤에게 넘겨주었다.
도르곤은 명나라 내분을 이용하여 1644년 명의 장수인 오삼계(吳三桂)의 투항을 받아냈으며 그를 선도로 하여 이자성을 토벌하고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한 뒤 수도로 삼았다(『인조실록』 22년 5월 7일)(『인조실록』 22년 5월 7일)(『인조실록』 22년 5월 23일). 비슷한 시기에 도르곤은 강력한 경쟁자 호오거를 역모로 체포하여 그의 권한을 박탈하였으며, 호오거가 관장하던 정황기(正黃旗)와 양황기(鑲黃旗)를 장악하였다.
순치제는 북경에 들어간 이후에 공식적으로 도르곤을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선포하였고, 이후 도르곤은 권력을 독단하게 되었다(『인조실록』 22년 12월 4일). 도르곤은 이어 1645년에는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으로, 다시 1648년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명칭을 달리하면서 권력을 누렸다. 그는 이러한 권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1650년에는 자신의 친모 울라나라씨를 효열무황후[孝烈恭敏獻哲仁和贊天儷聖武皇后]로 올리고 태묘에 부향(祔享)하였다(『효종실록』 1년 10월 4일). 이로써 도르곤은 사실상 황제로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으나 그해 11월에 급서하였다(『효종실록』 1년 12월 9일).
도르곤은 사후 황제로 추존되어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받았으나, 그의 권력 독단에 반발한 세력이 결집하여 탄핵함으로써 모두 삭탈당하고 말았다. 당시 청은 조선에 도르곤의 황제 추존과 친모의 황후 추존 등을 알리는 문서를 보냈으나, 도르곤의 사후 이를 모두 환수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 2년 2월 11일)(『효종실록』 2년 3월 17일).
상훈 및 추모
1650년 도르곤이 사냥 도중에 급서한 뒤, 순치제는 그에게 충(忠)이라는 시호를 내려 호쇼이[和碩] 예충친왕(睿忠親王)이라 하였다. 또 같은 해에는 황부(皇父)라 하여 도르곤을 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로 추존하고, 이듬해에는 태묘(太廟)에 올렸다. 묘호(廟號)는 성종(成宗)이었다.
도르곤은 사후 순치제가 친정(親政)하게 되면서 묘호와 시호를 포함한 모든 명예를 추탈당하였다가, 1778년 건륭제가 도르곤의 관작을 복권하여 호쇼이 예친왕으로 삼음으로써 친왕의 작위를 유지한 채 태묘(太廟)에 배향되었으며, 성경(盛京)의 현왕사(賢王祠)에도 입사(入祀)되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劉爲, 「試論攝政王多尔衮的朝鮮政策」, 『中國邊疆史地硏究』, 2005年 3期.
- 李尙英, 「乾隆爲多尔衮平反昭雪」, 『紫禁城』, 1991年 6期.
- 趙丰年, 「濟尔哈朗與多尔衮比較硏究」, 『黑龍江史志』, 2015年 7期.
- 陳作榮, 「論多尔衮在建立淸政勸過程中政策的两重性」, 『東北師大學報』, 1983年 2期.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