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언성(那彦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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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에 활동한 청나라 만주족 출신 관료.

개설

나언성은 1789년에 진사가 되고 편수(編修)에 올랐다. 공부상서(工部尙書)·군기대신(軍機大臣)과 양광총독(兩廣總督)을 역임하였다. 1798년에 흠차대신(欽差大臣)이 되어 백련교(白蓮敎)를 진압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진압에 실패하여 파직되었다. 1813년에 다시 흠차대신이 되어 이문성(李文成)의 난을 진압하였다. 직례(直隷)와 섬감(陜甘)의 총독을 지낸 후, 1820~1828년에 발생한 장격이(張格爾)의 난이 평정되자 흠차대신으로 난을 수습하였는데, 일처리가 매끄럽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직무에서 물러났다.

가계

나언성은 만주 정백기(正白旗) 사람으로 조부는 아가(阿佳)였다. 큰아버지 아적사(阿迪斯)는 성도장군(成都將軍)을 역임하였다. 그는 묘족(苗族)의 비적(匪賊)이 천서(川西) 지방을 침략하였을 때 이를 방관하다가 황제의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활동 사항

1799년(정조 23)에 연경에서 돌아온 정사 구민화(具敏和), 부사 김이익(金履翼), 서장관 조석중(曺錫中)은 문견 별단(聞見別單)에서 나언성을 소개하였다. 별단에 의하면 나언성은 공부상서로 기밀을 다루는 군기처(軍機處)에 파견 근무를 하고 있으며, 외모가 출중하고 행동거지도 보통이 아닌 인물이었다(『정조실록』 23년 7월 10일).

1798년에 나언성은 흠차대신한군도통(漢軍都統)으로 임명되어서 백련교를 진압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정조실록』 23년 11월 16일). 그는 관동(關東) 흑룡강(黑龍江)의 군대 3,000여 명과 관군 수만 명을 이끌고 경략장군 액륵등보(額勒登保)와 함께 섬서·감숙 지역의 백련교를 협공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패배하고 부상을 입었다(『정조실록』 24년 2월 6일). 이로 인하여 나언성이 사망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지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4년 3월 8일). 후에 그는 천감참찬(川甘參贊) 직을 수행하였다(『정조실록』 24년 5월 6일).

나언성은 평안북도 용천군 신도면의 압록강에 위치한 신도(薪島: 일명 장자도)를 직접 탐문하였는데, 돌아온 뒤 보고서에 조선과 청의 경계에 목책을 건설함으로써 무단으로 월경하는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순조실록』 4년 3월 22일). 조선 조정에서는 나언성을 황제의 신임을 받는 만족의 훈척 출신 관료로서, 몸집이 웅장하고 지략이 상당하며 재주와 슬기를 겸비한 인물로 알려졌다.

상훈 및 추모

상서함(尙書銜)에 추증.

참고문헌

  • 임종욱 편,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화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