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길종(源吉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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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호막부 8대 장군.

개설

1684년 10월 21일 어삼가(御三家) 중의 하나인 기주(紀州) 2대 번주 덕천광정(德川光貞)의 4남으로 1684년 기이국(紀伊國) 화가산(和歌山)에서 태어났다. 1705년 22세의 나이로 기주번의 4대 번주가 되었다. 이때 장군 강길(綱吉)로부터 이름 글자의 하나를 하사받아 길종(吉宗)으로 개명하였다. 1716년(숙종 42) 사망한 덕천가계(德川家繼)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길종이 장군직을 잇게 되었다. 재위 기간은 1716~1751년이다.

가계

덕천광정의 4남으로 태어났다. 형 중 한 명이 요절하였기 때문에 3남이라고도 한다. 생모는 기주덕천 가문의 하인인 거세육좌위문(巨勢六左衛門)의 딸 정원원([淨円院], お油利の方)이다.

활동 사항

1716년(숙종 42) 덕천가계(德川家繼)가 여덟 살의 나이로 요절하여 2대 장군 덕천수충(德川秀忠) 이래로 내려온 남자 후계자의 혈통이 끊어지자 어삼가(御三家)의 당주 중 한 명인 길종이 장군직을 잇게 되었다(『숙종실록』 42년 6월 9일). 그의 장군직 계승을 계기로 조일 간에 항례가 되어 온 통신사 교섭이 시작되었는데, 1718년 12월에 정사에는 홍치중(洪致中), 부사에는 황선(黃璿), 종사관에는 이명언(李明彦)이 임명되었고, 총사행원은 474명이었다(『숙종실록』 45년 1월 29일). 1719년(숙종 45) 4월 11일에는 통신사 일행이 세자의 알현을 마치고 왕성을 출발하였다(『숙종실록』 45년 4월 11일).

8대 장군으로 취임한 직후 6대 장군 덕천가선(德川家宣) 이래 어용인(御用人)인 간부전방(間部詮房)·신정백석(新井白石) 등을 파면하고 장군 친정정치를 확립하였다. 이후 향보개혁(享保改革)을 추진하였다. 그는 당시까지의 문치정치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무단정치(武斷政治) 중심의 덕천가강(德川家康)시대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으며, 검소와 검약을 중시하며 무사들의 풍속 개선을 강조하였다.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정면법(定免法)·상미령(上米令) 등을 시행하여 막부의 재정을 안정시켰으며 토지 개발을 장려하였고, 족고제(足高制)를 총해 지출을 축소하고 관료제도를 개선하였다. 또한 소송 기간을 축소하여 판결이 빠르게 진행되도록 한 사법제도의 개혁과 화재 대책 마련, 대오(大奥)의 정비, 직소 상자[目安箱] 설치를 통한 백성들의 의견과 불만 반영, 의료 정책의 개선, 외국서적 수입 기준 완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개혁과 변화가 이루어졌다.

한편 그는 1712년 대마번(對馬藩)에 조선에서 나는 약재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왜관을 통하여 조선의 풀과 나무, 새와 짐승 등을 전반적으로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 내 각종 약재의 존재 유무, 약재 명칭의 차이, 약재 동식물 그림 및 생초(生草) 입수 등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강호시대에 많은 양의 약재가 해외에서 수입되고 그 대금으로서 막대한 금은이 해외에 유출되었다. 특히 조선 인삼의 수입은 인삼 전용 화폐가 주조될 만큼 막대한 은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 인삼의 일본 내 재배는 국가 재정의 재건을 위하여 취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745년 9월 25일 장군 지위를 장남 가중(家重)에게 물려주고 서쪽성[西ノ丸]으로 물러났으나 사실상 실권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장악하였다. 1751년 6월 20일 강호성(江戶城)의 서쪽성에서 68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동경(東京) 상야(上野)의 관영사(寬永寺)에 있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89.
  • 三宅英利, 『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6.
  • 田代和生, 『江戶時代朝鮮薬材調査の硏究』, 慶應義塾大學出版会,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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