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교(源義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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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원의교 |
한글표제 | 원의교 |
한자표제 | 源義敎 |
동의어 | 족리의교(足利義敎) |
관련어 | 가길(嘉吉)의 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인물 |
지역 | 일본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성익 |
이칭(자,호,봉작호,시호) | 족리의교(足利義敎), 첨장군(籤將軍), 악어소(悪御所) |
성별 | 남 |
생년/일 | 1394년 7월 12일 |
몰년/일 | 1441년 7월 12일 |
출신지 | 일본 |
관력 | 장군, 참의(參議), 좌근위중장(左近衛中將), 권납중언(權大納言), 증태정대신(贈太政大臣) 등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 족리의만(足利義満) 모: 등원경자(藤原慶子)형 : 의지(義持), 의사(義嗣), 의소(義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원의교(源義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0년 12월 7일, 『세종실록』 11년 12월 3일, 『세종실록』 11년 12월 3일, 『세종실록』 11년 12월 9일, 『성종실록』 10년 2월 9일, 『세종실록』 30년 9월 1일 |
일본 실정막부 제6대 장군.
개설
실정막부의 장군인 족리씨는 조선과 통교 시에는 본성인 원(源)을 사용하였다. 의교는 3대 장군 의만(義滿)의 아들이며 4대 장군 의지(義持)의 친동생이다. 1394년 의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춘인(春寅)이었다. 1403년 출가해 법명을 의원(義圓)이라고 하였다. 이후 불법에 전념, 조정으로부터 준후(准后)의 칭호를 받고 승려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대승정(大僧正)에도 올랐다.
4대 장군 의지는 아들인 의량(義量)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에도 실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량이 장군에 오른 지 2년이 안 되어 사망해 그 뒤에는 실질적인 장군으로서 정치를 행하였다. 의지는 친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1428년 병환이 깊어져 위독한 상태가 되었지만 후계자 지명을 거부하여, 결국은 중신들의 결정에 의하여 의지의 동생들 가운데 제비뽑기로 후계자를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의원이 후계로 결정되었는데 몇 번의 거절 끝에 중신들의 거듭된 간청으로 결국 이를 수락하여, 3월 환속해 이름을 의선(義宣)으로 칭하였다. 의교는 일찍 출가해 정식 관위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장군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하위 관직을 받은 뒤 점차 승진, 다음 해인 1429년 3월 의교(義敎)로 개명하고 장군의 자리에 올라 14년간 군림하였다.
내용 및 특징
치세 초에는 전대의 예를 따라서 정책의 결정은 장군의 보좌역인 관령(管領) 이하 중신들의 합의를 기본으로 하였으나 점차 장군전제를 지향하게 되었다. 의교는 부친의 통치방식을 모범으로 삼고 의지가 폐지하였던 의만의 정책을 다시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명과의 통교재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의교는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히 다루고 관령 등 유력 영주 세력의 권한을 축소시키려 하였다. 이 때문에 유력 영주들의 불만 및 불안이 증가하였다. 1439년 영향(永享)의 난이 발생하였지만, 이를 진압해 관동 지방을 평정하고 유력 영주들의 가독계승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의교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수호(守護) 직위의 영주들도 주살되었는데, 1441년 6월 의교로부터의 공격을 우려한 적송만우(赤松滿祐)가 자신의 저택으로 의교를 유인해 살해하였다. 아울러 이때 동행하였던 대내지세(大內持世)는 부상을 입었다가 다음 달 사망하였다. 7월 적송씨에 대한 토벌이 본격화되어 결국 적송씨는 멸망하였다. 이를 가길(嘉吉)의 난이라고 한다.
활동 사항
장군 원의지의 사망에 따라 조선에서는 1428년 12월 의교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는 통신사로 박서생(朴瑞生) 등을 파견하였다(『세종실록』 10년 12월 7일). 박서생은 다음 해 돌아와 12월 ‘일본국왕 원의교’ 명의의 답서를 조정에 바치고(『세종실록』 11년 12월 3일) 사행을 통하여 취득한 정보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세종실록』 11년 12월 3일). 그런데 이때 세종의 말을 통하여 실정막부에서 원의지 사망과 관련한 정식 사절(일본국왕사)이 파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11년 12월 9일). 이때 세종은 “(의교가) 즉위함에 미쳐서도 또 사신을 보내어 수호의 뜻을 통해 오지도 않는다.”고 불쾌한 의중을 나타내고 있는데,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의교가 아직 장군에 오르지 않았던 상태에서 축하사절이 파견되어 온 것이 된다.
『성종실록』에는 1443년(성종 10) 일본으로 파견된 사신단에 속해 있던 이인규(李仁畦)가 의교의 사망 관련 이야기를 비롯하여 일본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성종실록』 10년 2월 9일), 이때 실정막부의 ‘장군’에 대하여 ‘황제(皇帝)’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 아울러 당시 사신단의 일원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의교의 죽음에 대해서 자세히 적고 있다. 그 외에 의교가 명과 다시 통교를 재개한 것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도 있다(『세종실록』 30년 9월 1일).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今谷 明, 『籤引き將軍足利義教』, 講談社, 2003.
- 森 茂暁, 『室町幕府崩壊 -將軍義教の野望と挫折』, 角川學藝出版, 2011.
- 민덕기,「실정막부(室町幕府)의 대명조공(對明朝貢) 중재 요청과 조선의 대응」, 『일본역사연구』 1, 일본사학회, 1995.
- 한문종, 「조선전기 일본국왕사의 조선통교」, 『한일관계사연구』 21, 한일관계사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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