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문정(范文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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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에 투항한 청나라 개국대신.

개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努爾哈赤], Nurhaci)에게 투항하여 총애를 받았다. 1636년 내비서원(內秘書院) 대학사(大學士)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사건에 참여하였다. 그는 1644년 입관(入關)을 전후하여 살육과 약탈을 엄금하고 군대의 기율을 분명하게 세워 인심을 얻을 것을 건의하였다.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발상(發喪)을 허락하도록 주청하여 명나라 종실구신(宗室舊臣)들의 동요를 막았고, 아울러 조세의 감면을 건의하고 과거 시험을 거행할 것과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둔전을 개간하는 일을 실행하여 농업 생산을 회복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청나라 초기 4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청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범문정의 집안은 원래 강서(江西) 낙평(樂平)에 거주하였는데, 명나라 초에 선조가 강서에서 심양 무순(撫順)으로 유배를 오면서 심양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영리하며 진중하고 강직하였다. 그의 형 범문채(范文寀)와 함께 심양원학생원(瀋陽縣學生員)이 되었다.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撫順)을 함락시키자, 그는 형과 함께 자발적으로 투항하였다. 홍타이지가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로 기용하였다. 1629년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전에 수행하였던 범문정은 원숭환(袁崇煥)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명의 숭정제가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사실을 정확히 꿰뚫고 반간계를 구상해 성공시켰다. 1636년 내비서원대학사에 임명되어 국가의 일에 참여하였다.

1637년 1월에 조선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한 이후 조선은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에게 비문을 지어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였다. 이때 범문정 등은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이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다고 하면서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다고 하여, 인조가 이경석에게 고쳐 짓게 하였다(『인조실록』 16년 2월 8일). 또 1640년에는 범문정 등이 남한산성을 증축한 일과 귀화한 도주자를 곧바로 추쇄하여 돌려보내지 않은 일 등에 대하여 질책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8년 1월 17일).

범문정은 1644년 입관(入關)을 전후하여 살육과 약탈을 엄금하고 군대의 기율을 분명하게 세워 인심을 얻을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명 숭정제의 발상(發喪)을 허락하도록 주청하여 명나라 종실구신의 동요를 막았고, 조세 감면과 아울러 과거시험 거행과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면서 둔전을 개간하는 일을 실행하여 농업 생산을 회복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청나라 초 4명의 황제를 모시면서 청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안정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명사(明史)』
  • 『청사고(淸史稿)』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