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金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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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무장·대명(大名).

개설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양자가 되어 정유재란(1597년, 선조 30) 때 참전하였으며, 울산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길 사후에는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신종(臣從)하여 50만 석 대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21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가계

목하씨(木下氏)의 연혁은 불분명하다. 목하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수길이다. 수길은 애초에 목하씨를 칭했으며, 이후 우시씨(羽柴氏), 풍신씨(豊臣氏)로 성을 바꾸었다. 수길은 공적 있는 수하들에게 자신의 옛 성인 목하를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금오의 부친인 목하가정(木下家定)도 그 한 예이다. 가정은 본래 환무천황으로부터 평성을 하사받은 가문인 환무평씨(桓武平氏) 계통으로 일컬어지는 삼원씨(杉原氏) 출신이었다. 한편, 금오는 처음 수길의 양자가 되어 우시씨를 칭했지만, 1594년에는 재차 소조천륭경(小早川隆景)의 양자가 되어 소조천씨(小早川氏)가 되었다. 금오는 후사 없이 요절하여, 대명(大名)으로서의 소조천씨는 대가 끊겼다.

활동 사항

금오의 부친 목하가정은 풍신수길의 정실인 고태원(高台院)의 오빠였다. 이러한 혈연관계로 인해 금오는 세 살 때 수길의 양자가 되었고, 10세의 나이에 참의(參議), 우위문독(右衛門督)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관력으로 인해 소조천수추는 위문부(衛門府)의 중국식 명칭인 금오(金吾)로 통칭되게 되었다. 금오가 수길의 양자라는 사실은 항왜(降倭)에 대한 공초를 통해 조선 조정에 보고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28년 4월 19일).

1594년 수길과 측실 정전(淀殿) 사이에서 수뢰(秀賴)가 태어나자 금오는 다시 소조천씨의 양자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 조선에 출진하여 울산에 고립된 일본군을 구원하기도 하였지만, 이내 일본으로 소환되었다.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는 표면상 서군에 속해 있었지만, 사전에 상대편인 덕천가강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금오의 배반은 관원 전투의 향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다. 전후에는 전공을 인정받아 50만 석이 주어졌다. 이후 금오는 강산성(岡山城)을 거점으로 삼아 영국(領國) 통치에 임했지만, 정치가로서의 수완은 없었던 듯, 볼만한 치적은 없다. 21세의 나이에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묘소

강산현(岡山縣) 강산시(岡山市) 서운사(瑞雲寺).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7.
  •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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