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제(嘉慶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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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제7대 황제.

개설

가경제는 건륭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고, 연호는 가경이었다. 그의 치세 기간 동안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을 비롯한 많은 민란이 계속되어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계속되는 민란과 관리들의 부패, 아편 수입의 급증 등의 문제로 재정이 크게 악화되어 청의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가계

건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 제6대 황제인 건륭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다. 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고 둘째 아들인 민녕(旻宁, [Mínníng])이 황위를 계승하여 도광제(道光帝)가 되었다.

활동 사항

1796년 아버지 건륭제가 양위하여 즉위하였고, 연호를 가경으로 정하였다. 가경제의 즉위 소식과 가경 연호를 정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에도 전해졌다(『정조실록』 19년 11월 6일). 즉위 이후에도 4년(1799)까지 태상황제(太上皇帝)인 건륭제와 건륭제의 총신이었던 화신(和珅)이 권력을 계속 장악하여 도광제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가경제가 즉위한 직후부터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특히 백련교도의 난이 크게 일어났다. 하지만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799년 마침내 건륭제가 사망하자 가경제는 권력을 쥐고 있던 화신을 제거하는 한편 난을 진압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각지의 민중들이 백련교도의 난에 호응·가담하면서 반란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백련교의 일파였던 천리교(天理敎) 역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들도 각지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813년에는 천리교도가 황궁 내의 환관들까지 포섭하여 황궁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운남 지역에서도 묘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9년간의 백련교도의 난(1796~1804년)과 10년간의 묘족의 난은 결국 진압되었으나, 이 여파로 청조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청에서 백련교도를 비롯하여 반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에도 전해졌다[ 『정조실록』 23년 11월 16일 2번째기사].

이와 같은 재정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청 조정은 고위 관직을 팔아 수입을 늘리려고 하였으나 이로 인해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졌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과중하여 민심 이반이 점차 심각해졌다. 치세 말기에는 영국으로부터 아편의 수입이 점차 늘어나 많은 양의 은화가 국외로 유출되었고, 이로 인하여 정부 재정은 더욱 고갈되었다. 건강이 악화된 가경제는 1820년 향년 61세로 붕어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제2황자 지친왕민녕이 도광제로 황위를 계승하였다.

묘소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 청서릉(淸西陵)의 창릉(昌陵)

참고문헌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화문화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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