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성순(宗盛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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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室町)시대 후기의 대마 수호(守護).

개설

종성순(宗盛順)은 종씨 13대 당주로 종재성(宗材盛)의 장남이다. 모친은 종씨의 서류인 인위중촌가(仁位中村家) 출신이며, 성순은 초명으로 후에는 의성(義盛)이라고 했다. 통칭은 언칠(彦七)이며 찬기수(讚岐守)를 칭했다.

대마도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순은 1505년 부친이 은퇴하여 그 뒤를 이어 가독이 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509년 부친 재성의 사망으로 뒤를 이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재성이 발급한 문서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1501년이고 성순 발급 문서 중 제일 처음의 것은 1492년이다. 이런 사실들 때문에 성순이 언제부터 ‘대마도주’의 자리에 올랐는지는 고려할 여지가 많다.

사망 시기도 확실하지 않은데 1520년까지 대마국 수호(守護)직을 유지하였다.

내용 및 특징

1510년 장군 족리의윤(足利義尹)으로부터 의(義) 자를 내려받으며 옥형호(屋形号)를 허락받아 의성(義盛)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대마도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다음 해인 1511년 경도로 올라가 장군 의윤으로부터 북근강(北近江)에 8,000관(貫)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확증은 없다.

1510년 4월 조선의 삼포에서 항거왜인(恒居倭人)들이 난을 일으키자 성순은 대마도로부터 원군을 보냈다. 그 총세는 약 4,5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우발적이 아닌 종씨의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는데, 조선을 압박하여 교역 제한과 항거왜에 대한 억제 정책 등을 완화시키려 한 것이다. 왜군은 부산포을 공격하여 첨사이우증(李友曾)을 살해하고 제포를 공격해 첨사김세균(金世鈞)을 포로로 잡았다. 이어 동래성과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조선군이 반격하여 결국 왜군은 대마도로 물러났다. 그 뒤 6월에도 왜군이 다시 공격하였으나 조선군에 의하여 격퇴당하였다. 삼포의 난 이후 삼포의 항거왜는 전부 추방되고 대마도의 조선통교도 모두 중단되었다. 성순은 조선에 삼포왜란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고 결백을 주장하는 한편 일본국왕사 봉중(弸中) 등을 보내 통교회복을 교섭하였다. 그 결과 1512년(중종 7) 임신약조가 맺어지고 통교회복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전보다 교역 조건은 더욱 악화되었고 왜인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는 결과가 되었다.

근세에 편찬된 『관정중수제가보(寬政重修諸家譜)』에는 1520년 12월 6일, 45세로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521년 3월 성순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1522년 성순의 뒤를 이은 종성장(宗盛長)이 성순을 공격하여 죽였다고 대마도 및 일본국왕사가 보고하는 내용이 있지만 다른 증거는 없다.

활동 사항

종성순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96년(연산군 2)이다(『연산군일기』 2년 12월 26일). 이때 성순은 ‘종언칠성순(宗彦七盛順)’의 이름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는 아직 부친인 종재성의 뒤를 잇기 전으로 종재성은 ‘도주(島主)’의 명의로 조선과 통교를 하고 있었다. 성순은 이와 별도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이후에는 재성과 동시에 사신을 파견해 오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6월 1일). 특기할 만한 사항은 ‘언칠(彦七)’이라는 통칭인데, 이 통칭은 성순의 부친·조부·증조부도 조선과 통교할 때 모두 사용하였다. 이 통칭은 종씨 11대 당주 종정국(宗貞國)의 부친인 종성국(盛國) 계통의 적자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울러 성순이 도주의 명의를 사용한 것은 1509년부터이다(『중종실록』 4년 7월 13일).

성순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의 뒤를 이은 종성장(宗盛長)이 성순을 공격해 죽였다는 내용과 관련해서이다. 1522년 성장은 조선에 보낸 보고에 의하면, 경오년에 반란을 주창한 성순의 죄를 일본에 보고하고 치려고 하자 일본에서도 당연하게 여기고 10도(島)의 군사를 출동시켜 도주(島主)를 도와 성순을 쳤고, 또한 반란의 괴수 두 사람을 잡았다는 것이었다(『중종실록』 17년 2월 13일). 그리고 일본국왕사도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같은 취지의 이야기를 조선에 전하였다(『중종실록』 16년 5월 25일) 또한 일본국왕사들은 성순을 공격한 이유에 대하여 성순이 경오년(삼포왜란)의 한을 품고 재차 조선에서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런데 성장과 일본국왕사는 성순을 공격한 성장의 공을 내세우면서 삼포왜란 이후의 통교 상황 개선을 조선에 요청하였다. 일본국왕사들의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성순은 귀국에 불충하였기 때문에 귀국에서 구례를 감한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장은 귀국을 위하여 성순을 죽였으니, 마땅히 구례에 의하여 우대하여야 합니다.’라는 것이었다(『중종실록』 18년 7월 21일).

즉, 성장은 삼포왜란과 그 이후 통교 제한의 원인을 제공한 성순을 처벌하였으므로 조선의 통교 제약을 풀어 달라고 한 것이다. 삼포왜란 후 그 수습 과정에서 조선은 대마도 측에 통교 재개의 조건 중 하나로 성순의 압송을 요구하였지만 실현되지 않았었는데(『중종실록』 17년 3월 25일), 성장은 성순을 죽임으로써 그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주장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1520년에 성순이 이미 사망하였다면 성장은 그 죽음을 조선과의 교섭에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가짜 사신인 위사(僞使)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던 때로 특히 일본국왕사의 경우에는 이 무렵 파견되었던 사신들은 전부 위사였다는 주장까지도 있기 때문에 이때의 일본국왕사도 실제로는 대마도에서 파견한 위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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