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도(吳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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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의 부하로 조선에 파견된 관리.

개설

오종도가 조선에 파견된 이유는 현재의 기록으로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경략송응창 휘하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던 것은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조선에 파견되었던 초기에는 주로 병력을 인솔하고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군사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점차 조선 조정과 전략과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눌 정도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아울러 조선 조정의 입장을 배려하고 몸가짐이 검소하며 선물 등을 좋아하지 않아 선조를 비롯한 신료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관직은 지휘(指揮)였다.

활동 사항

오종도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1593년(선조 26)이다. 당시 오종도는 평안도 정주의 역참인 신안관(新安館)에서 황응양(黃應暘)·유준언(兪俊彦)과 함께 선조를 접견했다(『선조실록』 26년 1월 23일). 오종도는 1593년(선조 26) 1월을 전후로 해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맡았던 직임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이전에 조선에 파견되었다면 기록에서 확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종도가 처음에 맡았던 임무들은 대체로 병력을 인솔하고 진격하면서 주요 도시 등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종도가 명군 내에서 맡았던 역할이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경력송응창이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에게 각각 참장(參將)과 유격(遊擊)의 관명을 임시로 주어 일본에 보내려 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오종도가 맡고 있던 임무가 결코 사소하지 않고 중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송응창은 사용재, 서일관과 함께 심사현(沈思賢), 호측(胡則), 오종도를 불러서 오랫동안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선조실록』 26년 4월 2일).

1596년(선조 29)부터는 그의 역할이 증대되어 전쟁의 전략과 군량 문제, 일본에 대한 대응 방안 등 다양한 의견을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오종도가 보냈던 의견들은 주로 조선 조정의 입장을 고려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명군에서 일본의 책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조선 측에 일본군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종도는 일본의 책봉을 추진하는 명군 장수들의 의견만을 믿지 말고 일본군의 상황을 숨기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밝히는 동시에 조선의 병력 수와 군량 현황 등을 함께 보고해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조선이 미리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면 싸우거나 지키는 기회를 둘 다 그르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전투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오종도의 의견에 대해 선조는 자신의 뜻에 부합한다며 비변사에 대응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선조실록』 29년 5월 2일).

조선 조정에서는 오종도·호응원(胡應元) 등의 장수를 몸가짐이 검소하고 쓸데없는 일로 번거롭게 하지 않는 명군의 장수로 높게 평가했다(『선조실록』 29년 5월 28일). 또 비변사에서는 오종도가 조선의 일을 크게 염려해서 공문을 올려서 의견을 보낸 것은 배려하는 뜻이 깊은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선조실록』 29년 5월 30일). 조선 조정에서는 오종도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에는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위한 임무를 부여받고 일본군의 진영으로 파견되기도 했다(『선조실록』 30년 9월 16일). 임진왜란 종전 후에도 요동 지역에서 관직을 맡아 조선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오종도가 맡았던 관직은 요동진강유격장군(遼東鎭江遊擊將軍)이었다(『선조실록』 40년 3월 5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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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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