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家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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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가선(德川家宣)의 셋째 아들로 일본 강호막부의 7대 장군.

개설

어린 나이에 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 실권은 측용인(側用人)인 간부전방(間部詮房)이 장악하였으며, 유학자인 신정백석(新井白石)이 제안하는 여러 정책이 추진되었다.

가계

강호막부의 7대 장군 덕천가선(德川家宣)의 셋째 아들이며, 모는 승전씨(勝田氏, [お喜世, 月光院])였다.

활동 사항

형인 가천대(家千代)가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었고 1712년 덕천가선이 사망하자 이듬해인 1713년에 다섯 살의 나이로 장군직에 올랐다. 가계가 장군직에 올랐다는 소식은 그해 5월에 차왜(差倭) 평륜구(平倫久)를 통해서 조선에 전해졌다. 당시 동래부사였던 이명준(李明浚)은 일본 측에 보내는 외교문서인 서계(書契)에 가계의 ‘계(繼)’ 자를 피하여 쓰지 말 것을 조선 조정에 요청하였다(『숙종실록』 39년 5월 30일).

가계는 어린 나이에 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 실권은 측근 보좌 격인 간부전방에게 있었으며, 유학자인 신정백석이 제안하는 여러 정책, 즉 정덕금은(正德金銀)의 발행, 정덕장기신례(正德長崎新例)의 발포 등이 추진되었다. 1716년 4월 8세의(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짧은 재위 기간 때문이었는지 장군직의 습직을 축하하는 통신사의 파견 논의는 없었다. 사후에 유장원전(有章院殿)이라는 시명(諡名)이 내려졌다.

묘소

증상사(增上寺)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