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택(胡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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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책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인물.

개설

임진왜란 당시 호택의 관직은 참장(參將)이었다. 유격장군(遊擊將軍)심유경(沈惟敬)과 함께 일본과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조선의 군신과는 수많은 외교적 갈등을 초래했다. 또한 시랑(侍郞)고양겸(顧養謙)의 지시에 따라 많은 활동을 했다. 호택이 했던 가장 대표적인 일은 조선 조정에 주본(奏本), 즉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올려 일본에 대한 책봉을 요청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활동 사항

호택은 처음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인 1593년 초에는 심사현(沈思賢)·서행(徐行)·오행도(吳行道) 등의 장수와 함께 활동했다. 이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파견 목적이 강화 때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일본군을 속여 성을 나가게 한 다음 공격해서 섬멸하고 전진하려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했다(『선조실록』 26년 4월 1일). 실제로 이들은 대구(大丘)·선산(善山)·조령(鳥嶺) 등지로 가서 지세의 험한 곳을 파악한 뒤, 관(關)이나 채(寨) 혹은 보(堡)를 세우고자 한다면서 전선(戰線)을 돌아봤다(『선조실록』 26년 7월 7일).

하지만 1594년(선조 27)이 되자 이들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났다. 애초에 고양겸은 심유경이 추진했던 강화를 반대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심유경의 강화 추진 방안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곤장을 치려고 했다는 일 등이 조선 조정에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말에 고양겸은 조선 측에 자신이 5월 중순경에 호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명에 봉공(封貢)하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호택은 고양겸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서 조선 조정에 일본의 봉공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주본을 보내도록 강요하기 시작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당연히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호택은 조선의 존망이 고양겸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주본을 보내도록 조선 조정을 강하게 압박했다(『선조실록』 27년 5월 27일).

결국 조선 조정에서는 논란 끝에 호택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봉공을 요청하는 주본을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한다. 조선의 결정에 호택은 크게 기뻐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주본의 초고를 호택에게 보여주고 그가 수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문서를 작성했다(『선조실록』 27년 6월 25일).

참고문헌

  • 『기재사초(寄齋史草)』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한위략(征韓偉略)』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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