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정무(宗貞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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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정(室町)시대 전기의 무장이자 제8대 대마도 도주(島主).

개설

1398년에 그 이전까지 대마도 내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종씨(宗氏) 일족의 서자 집안인 인위종씨(仁位宗氏) 계열의 종뢰무(宗賴茂)를 토벌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 후 소이씨(少貳氏)와 함께 구주(九州)로 출병하였다가 종뢰무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1399년 7월에 다시 정권을 되찾았다. 같은 해 말에 종오랑(宗五郎)이 모반을 꾀하였지만 기선을 제압하여 미연에 막고 이후 영지의 경영에 노력하여 겨우 안정을 찾게 되었다. 아버지는 종상무(宗尙茂)이며, 그의 아들 종정성(宗貞盛)은 대를 이어 제9대 대마도주가 되었다.

활동사항

구주 본토(本土)와의 관계에서는 소이씨를 도와 구주 탐제(探題) 삽천만뢰(澁川滿賴)·대내씨(大内氏)와의 항쟁을 반복하였다.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왜구(倭寇)의 금압(禁圧)에 노력하여 조선에게 신뢰를 얻었다. 1399년(정종 1)에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왜구의 근절을 맹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정종실록』 1년 7월 1일). 1414년(태종 14)에 조선이 일본 각지에서 조선으로 오는 통교자를 제한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낼 수 있는 자를 일본국왕(日本國王)·대마도·대내씨·소이씨·구주 탐제 등 10곳으로 한정하기로 하였을 때 그 사실을 각각에게 통고하는 것을 종정무가 수행하였다. 조선의 통제책에 협력하여 입지를 강화하려는 대마도의 전통적인 정책은 종정무시대 때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망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1418년 3월에 종정무가 병이 났다는 보고가 조선에 전해졌다(『태종실록』 18년 3월 14일). 조선에서는 종정무에게 소합원(蘇合元)·청심원(淸心元)·보명단(保命丹)·양비원(養脾元)·정기산(正氣散) 같은 약과 소주(燒酒)를 적당히 헤아려 대마도로 돌아가는 사자 편에 보내 주었다(『태종실록』 18년 3월 14일). 그리고 그해 종정무가 사망하자 조선에서는 4월 24일에 치제(致祭)를 위하여 이예(李芸)를 파견하였고 왜구를 단속한 공적을 치하하여 특히 후하게 물자를 보냈다(『태종실록』 18년 4월 24일).

참고문헌

  • 三宅英利 著, 손승철 譯,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1.
  • 요시노 마코토 지음, 한철호 옮김,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 책과함께, 2005.
  • 한일관계사학회, 『한국과 일본, 왜곡과 콤플렉스의 역사』 2, 자작나무, 1998.
  • 『日本人名大辭典』, 講談社, 2009.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한문종, 「조선전기 이예의 대일교섭 활동에 대하여」, 『전북사학』 11,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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