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태(吳爾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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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대신으로 1722년 강희제의 유언을 조선에 가지고 온 인물.

개설

오이태는 청의 호부(戶部) 좌시랑(左侍郎), 성경병부시랑(盛京兵部侍郎) 등을 역임한 청의 대신이었다. 1722년 강희제가 사망하기 이전에 조서를 내려 치도(治道)와 자신의 업적을 논하고 황위를 넷째 아들 옹친왕(雍親王)윤진(胤禛)에게 잇게 할 것임을 알렸는데, 이 조서를 오이태가 칙사로서 조선에 전달하였다. 또 이듬해 조선에서 난두(欄頭)의 혁파를 요청하는 자문을 보냈을 때, 옹정제(雍正帝)의 지시로 형부(刑部) 시랑(侍郞)마이제(馬爾齊), 급사중(給事中)무항(繆沆) 등과 함께 이 문제를 조사하였다. 난두 문제는 이로 인하여 일단락될 수 있었다.

활동 사항

오이태는 주사(主事)를 거쳐 이부(吏部)의 낭중(郎中)으로 임명되었다. 1690년 이부 낭중오이태는 복건(福建)에서 발생한 재정 비리 사건을 심리하였다. 이 사건은 안계현(安溪縣)의 지현(知縣)을 지낸 손용(孫鏞)이 복건의 순무(巡撫)장중거(張仲擧)와 포정사(布政司)장영무(張永茂) 등이 비축된 재화를 사적인 축재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고발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오이태는 강희제의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으나 일을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하였다. 강희제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빠르게 승진시켰는데 일처리가 미진하였다고 하면서 일벌백계(一罰百戒)할 뜻을 밝혔다. 오이태는 복건 사건으로 인하여 낭중에서 해임되고, 흑룡강(黑龍江) 일대로 가서 능력을 인정받으라는 처벌을 받았다. 오이태의 행적은 1722년에야 다시 나타나는데, 내각(內閣) 학사(學士)에서 승진시켜 호부의 좌시랑으로 삼은 것이었다.

1722년 11월 13일 강희제의 유조(遺詔)가 반포되었다. 청에서는 두등시위(頭等侍衛=一等侍衛, [uju jergi hiya]) 부도통(副都統)나진(那眞)을 상사(上使)로, 내각(內閣) 학사(學士)겸예부시랑(兼禮部侍郞)오이태를 부사(副使)로 삼아 통관(通官) 4명과 함께 조서를 조선에 전하게 하였다. 먼저 11월 19일에 패문(牌文)을 보내어 30일에 경성(京城)에 먼저 들어왔고, 오이태 등의 칙사 일행은 11월 20일에 출발하여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너 16일에 경성으로 들어왔다. 조선 왕 경종은 왕세제(王世弟, 훗날의 영조)와 함께 모화관(慕華館)에서 오이태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후 경종은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여 환궁(還宮)하였고, 칙사(勅使)는 조선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을 경유하여 창덕궁(昌德宮)으로 들어가 인정전(仁政殿) 앞에서 조서를 선포하였다. 조서의 내용은 치도(治道)에 대한 형세와 강희제 자신의 업적, 자신의 넷째 아들 윤진(옹정제)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경종실록』 2년 12월 16일). 오이태 일행은 같은 달 22일에 경성을 떠나서 이듬해 1월 4일에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오이태는 1723년 7월 호부의 좌시랑에서 성경(盛京)의 병부 시랑으로 옮겨졌다. 이보다 앞서 오이태는 호부 시랑으로 있으면서 조선이 예부(禮部)로 보낸 난두의 혁파 문제를 처리하기도 하였다. 난두는 조선 사신이 가져가는 물자를 조달하는 상인을 이르는데, 이로 인하여 사행이 지체될 뿐만 아니라 물화의 품질이 떨어져 교역에도 지장을 주고 있었다. 오이태 등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바람대로 난두의 혁파가 실현되었다(『경종실록』 3년 10월 23일).

참고문헌

  • 『청성조실록(淸聖祖實錄)』
  • 『청세종실록(淸世宗實錄)』
  • 『청고종실록(淸高宗實錄)』
  • 『동문휘고(同文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