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기(茅國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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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무장.

개설

호는 행오(行吾)이고, 절강(浙江) 소흥위(紹興衞) 사람이며 1588년(명 만력 17) 무진사(武進士)에 급제하였다. 정유재란 때 참전하였다. 울산(蔚山)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올렸다. 이후 중로군으로서 동일원의 예하에서 활약하며 도진의홍(島津義弘)이 주둔하는 사천(泗川)으로 진군하며 전과를 올렸으나 도진의홍이 축성한 새로운 진지인 신채(新寨)에서 큰 패배를 당하면서 전력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후 일본 측과의 화의교섭에 나섰고 일본군이 일시에 철병한 것을 자신의 공으로 이용하려 했다.

가계

활동 사항

1597년 왜란이 다시 시작되자 유격(遊擊)으로 절강의 보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당시 왜적이 울산에 주둔하였으므로 마귀(麻貴)가 1597년 12월과 다음 해 1월에 걸쳐 울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왜적이 도산(島山)으로 달아나자 추격하여 6백여 구의 수급을 얻었다.

그러나 다시 일본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여러 장수들이 왜적을 열흘 동안 포위하여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본 측의 구원병이 이르러 도리어 명의 군대가 달아나면서 죽은 자가 1만에 달하였다. 당시 모국기는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일본군의 뒤를 끊어 왜적의 추격을 막아냈다.

이후 모국기의 군대는 전주를 거쳐 성주에 주둔하며 유민(流民)을 불러 모으고 둔전(屯田)하며 군사를 훈련시켰고 이곳에 관왕묘(關王廟)를 짓기도 했다. 만세덕(萬世德)이 양호(楊鎬)를 대신하여 조선으로 오자 형개는 다시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중로와 동로·서로, 그리고 해로로 나누었다. 모국기는 중로군의 동일원의 예하에 있었다. 중로군은 도진의홍이 주둔하던 사천으로 진군하여 진주를 취하고 망진(望晉)을 점령하였다(『선조실록』 31년 9월 25일). 그리고 승기를 타고 곤양(昆陽)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일본군들이 신채로 물러가자 중로군이 신채를 공략하였으나 군중에 큰 폭발이 일어나 크게 패배하면서 모국기의 병력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후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서는 일본군 철수교섭이 시작되었다. 모국기는 자신의 부하를 인질로 보내어 일본군의 철수를 보장하였다(『선조실록』 31년 12월 11일). 이러한 정황에 대해 명 조정으로부터 조사가 명해지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12월 14일). 또한 그가 일본 측과의 화친을 조건으로 왕자와 신하들을 보낼 것을 약속한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선조실록』 32년 2월 2일).

학문과 사상

저술 및 작품

묘소

상훈 및 추모

명에서 파견 나온 양응문(楊應文)이 임진왜란 당시의 공적을 조사하여 보고한 뒤 모국기는 울산 등지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금을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 『해동역사(海東繹史)』
  • 『난중잡록(亂中雜錄)』
  • 『매호유고(梅湖遺稿)』
  • 『명사기사본말(明史紀史本末)』
  • 『명사(明史)』
  • 김경태, 「임진왜란 후 명 주둔군 문제와 조선의 대응」, 『동방학지』147,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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