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임덕(葛林德)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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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갈임덕 |
한글표제 | 갈임덕 |
한자표제 | 葛林德 |
동의어 | 꼴랭 드 쁠랑시,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 |
관련어 | 경의선(京義線), 러일전쟁,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프랑스 / 대한민국 / 일본 |
시대 | 조선 / 대한제국 |
왕대 | 조선 / 대한제국 |
집필자 | 한승훈 |
성별 | 남자 |
생년/일 | 1853년 11월 22일 |
몰년/일 | 1922년 10월 21일 |
출신지 | 프랑스 상파뉴(Champagne) |
관력 | 상해 주재 프랑스 부영사, 주한 프랑스 정부위원(대리공사 겸 영사), 주한 프랑스 전권공사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부: 자크 플랑시(Jacques Auguste Simon Collin de Plancy)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갈임덕(葛林德)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24년 윤4월 9일, 『고종실록』 24년 5월 3일 |
초대(1888~1891) 및 제3대(1896~1906) 주한 프랑스 공사를 역임한 프랑스 외교관이자 미술품 수집가.
개설
갈임덕은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의 한자식 표기였다. 프랑스의 동양어문학교[à l'École des langues orientales, 현 프랑스국립동양언어문화대학: INALCO, Institut National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Orientales]에서 법학과 중국어를 공부하고 1877년에 졸업하였다. 1877년에 플랑시는 주청 프랑스 공사관의 견습통역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83년에는 상해 주재 프랑스 영사관의 부영사를 역임하였다. 1887년에 그는 조선으로 건너와 조불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였으며(『고종실록』 24년 윤4월 9일), 이듬해인 1888년 6월에 초대 주한 프랑스 정부위원(대리공사 겸 영사)로 임명되었다(『고종실록』 24년 5월 3일). 1891년 6월에 주일 프랑스 영사로 부임하였다가, 1896년에 다시 주한 프랑스 공사로 임명되어서 1906년까지 부임하였다. 1906년에 방콕에 잠시 머물다가 1907년에 외교관을 은퇴하였다.
가계
플랑시의 아버지 자크 플랑시는 예수회 수사 출신이자 작가로서, 1816년 『지옥사전(Dictionnaire Infernal)』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한편 자크의 어머니는 프랑스대혁명의 주역으로 자코뱅당에서 활약한 조르주 당통의 누이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초대 프랑스 공사로 재직한 1888~1891년에 플랑시는 조선에서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노력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네 차례의 사옥과 병인양요로 인해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개신교 선교 역시 의료와 교육에 국한되어 있었다. 플랑시는 조선 정부를 상대로 천주교 선교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교섭을 진행하였다. 특히 1891년 3월에는 프랑스 선교사 및 조선인 천주교 신자에 대한 폭행 및 구타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를 제물포로 출동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만성적 재정 부족에 시달리는 조선 정부에 프랑스 차관 도입을 주선하기도 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896년에 대리공사로 조선에 다시 부임한 플랑시는 조선 정부에서 외교 고문을 맡고 있었던 르젠드르(이선득)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의 그리유 상사가 서울-의주 간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 데 일조하였다. 3년 뒤 프랑스 측은 대한철도회사에게 부설권을 넘겨주었다. 1898년 4월에 러시아와 일본이 로젠-니시 협정의 체결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플랑시는 한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프랑스인 고문관의 한국 정부 등용, 프랑스 회사의 광산채굴권 확보 등에 주력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한국의 참가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1901년 프랑스 정부는 플랑시를 대리공사에서 전권공사로 승진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정부는 중립을 선포하였으며, 한국에서 플랑시의 입지는 축소되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프랑스인 고문관은 일본인으로 대체되었으며, 을사늑약으로 주한 프랑스 공사관이 폐쇄됨으로써 플랑시는 한국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방콕을 거쳐서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플랑시는 한국에 주재하는 동안 한국의 고도서·도자기 등을 수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프랑스로 가지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그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외교관으로 서울에 머물 때, 『한국서지(韓國書誌)』를 집필하도록 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책의 일정 부분을 함께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훈 및 추모
1902년 대한제국 훈1등 태극장(太極章)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편, 『구한국외교문서』 19·20권, 법안 1∼2, 1969.
- 국사편찬위원회 편, 『프랑스외무부문서』 1~9(한국근대사자료집성 11~19권), 2002~2010.
- 이은령·이상현, 「모리스 쿠랑의 서한과 한국학자의 세 가지 초상-『플랑시 문서철』(PAAP, Collin de Plancy Victor)에 새겨진 젊은 한국학자의 영혼에 대하여」, 『열상고전연구』 44, 2015.
- 홍순호, 「구한말 서구열강의 대한인식: 프랑스를 중심으로」, 『경영논총』 20-2, 이화여자대학교 경영연구소, 2002.
- 홍순호, 「대한제국시대의 한·불관계」, 『주제연구』 5,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