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효(陳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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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관료.

개설

1580년 진사가 되었다. 1597년 12월에 명군을 감찰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군무감찰어사(軍務監察御史)이다.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명군인 동정군(東征軍)의 공죄(功罪)를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나왔다. 이듬해 다시 각 진영을 돌아보며 감찰하였으나 1598년 2월 갑자기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양호(楊鎬)가 울산의 가등청정(加藤淸正) 진영을 포위했다는 말을 듣고는 천총(千摠)구양소(歐陽紹) 등을 보내 여러 방면에서 전투를 독려하게 하고 자신도 1598년 정월에 한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울산에서 군대가 후퇴하였기 때문에 공을 조사하지 못하고 3월에 요동으로 돌아갔다. 그해 10월에 서울에 다시 와서 전투 상황을 조사·보고하였다(『선조실록』 31년 10월 17일). 11월에 일본군이 모두 퇴각하였다고 하자 울산·부산·남원·전주 등 각 영의 군사가 주둔해 있는 곳을 두루 돌아보았다.

정응태(丁應泰)가 마귀(麻貴) 등의 군공 조작의 일을 조정에 보고할 때 진효 역시 정응태의 탄핵을 받았다(『선조실록』 32년 2월 10일).

1599년 정월에 형개(邢玠)의 군문(軍門) 이하 여러 아문과 함께 공을 조사한 데 따른 연회를 가졌는데 그 뒤 2월 22일에 갑자기 죽었다. 선조는 장례장소에 거둥하여 성대히 제사를 지내주었다(『선조실록』 32년 3월 4일).

상훈 및 추모

중국 조정에서 광록시경(光祿寺卿)을 추증하고 아들 한 사람을 음직(蔭職)에 기용했다.

참고문헌

  • 『매호유고(梅湖遺稿)』
  •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 『명사(明史)』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