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두(大頭)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13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청 태조누르하치의 장자 추연의 맏아들 아이신기오로 두두[aisin gioro dudu, 愛新覺羅 杜度]의 한자 이름.

개설

두두의 부친인 추연([褚英], cuyen)은 역모 혐의로 삭탈되었다가 1615년에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는 이유로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누르하치는 대신 추연의 아들 두두를 타이지([台吉], taiji)로 봉하였고, 1624년에는 버일러([貝勒], beile)로 올렸다. 홍타이지([皇太極], hongtaiji)가 등극하자, 명에 대한 정벌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모두 참가하였다.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한 뒤,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多羅安平貝勒], doroi elehun beile)에 봉해져 죽을 때까지 작위를 유지하였다.

가계

부친은 아이신기오로 추연이었다. 경친왕(敬親王)니칸([尼堪], nikan)의 형이었다. 추연이 역률로 죽었으므로 가족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두르호([杜爾祜], durho) 등 7명의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두두는 누르하치로부터 일찍이 타이지의 작위를 받았다. 1624년 몽고(몽골) 칼카([喀爾喀], kalka) 바요트([巴約特], bayot) 부락의 타이지 엉거더르([恩格德爾], enggeder)가 후금에 귀부할 때 두두는 이들을 맞이하고 호위한 공으로 버일러로 봉해졌다.

두두는 1627년 버일러 아민(阿敏, amin)을 따라서 조선 공격에 참가하였다. 이때 추연은 많은 전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강화 교섭에도 기여하였다. 1629년 홍타이지를 따라 정명전(征明戰)에 참가하여 수도 북경 일대를 유린하고 명의 원병을 격파하였다. 또 버일러 아바타이([阿巴泰], abatai) 등과 함께 통주(通州)를 공격하여 명나라의 선박들을 불태웠으며, 회군할 때 계주(薊州)에서 명의 원군 5,000여 명을 격파하였다. 이 시기에 두두는 명군의 주력을 섬멸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큰 전공을 세웠다.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을 정벌하였을 때와 1632년 내몽골의 차하르 세력을 정벌하였을 때에는 모두 성경(盛京)을 유수(留守)하였다.

1633년 명의 장수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 등이 무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자, 두두는 지르갈랑([濟爾哈朗], jirgalang), 아지거([阿濟格], ajige)와 함께 진강(鎭江)으로 나아가 그들을 영접하였다. 이즈음 홍타이지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과 조선, 차하르 몽골 가운데 어디를 먼저 공략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두두는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고, 이듬해에 군사를 이끌고 가서 명의 해주(海州)를 점령하였다.

1636년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한 뒤 여러 버일러와 관원들을 봉작할 때 두두는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에 봉해졌다. 그해 겨울 홍타이지가 조선을 공격하자 두두는 한인(漢人) 출신의 관료들과 함께 이를 뒤따르면서 치중(輜重)을 보호하고 피도(皮島)와 운종도(雲從島) 등 여러 섬에 주둔한 명군과 그 대안의 철산(鐵山)을 공략하였다. 두두는 곧 홍타이지의 명을 받고 남하하여 임진강을 건넜으며, 좌익군(左翼軍)의 수장 도르곤([多爾袞], dorgon)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두두가 가져온 화기는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638년 홍타이지가 몽고(몽골) 칼카를 정벌할 때 두두는 다이샨([代善], daišan), 지르갈랑과 함께 성경에 유수하였고, 같은 해 우익군(右翼軍)의 수장인 요토[Yoto, 岳托]의 부장이 되어 요서(遼西) 지역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641년에는 금주(錦州) 등지에서 출동한 명의 원군을 격파하였다. 두두는 1642년 청 조정에서 조선의 김상헌(金尙憲)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 참가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20년 1월 6일).

상훈 및 추모

도도는 1642년 6월 병으로 죽었다. 그가 죽을 무렵, 각 버일러와 대신들은 독공전(篤恭殿)에서 홍타이지와 함께 출정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홍타이지가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에 조정을 파하였다. 관이 돌아올 때에 대신을 파견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1724년 옹정제(雍正帝)는 두두를 위하여 비석을 세우고 그의 공적을 적었다.

두두는 1636년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로 임명된 이후, 일생 동안 작위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비록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홍타이지의 신임과 중용을 받지는 못한 탓이었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만문노당(滿文老檔)』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만주실록 역주』, 소명출판, 2014.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644~1912), Ch’eng Wen Publishing Company, 1972.
  • 杜家驥, 「『滿文老檔』 太宗朝的多鐸應爲杜度考」, 『史學集刊』, 1998年 3期.
  • 王强, 「杜度生卒年小考」, 『中國書法』, 2013年 7期.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