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공(鄭成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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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부흥운동을 하고, 대만에 정씨 왕국을 세운 인물.

개설

정성공은 7세 때 부친의 부름을 받아 혼자 명에 건너갔고 남경 태학에 입학해 전겸익(錢謙益)에게 배웠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당왕(唐王)융무제(隆武帝)가 즉위했다. 그는 1647년 아버지가 청나라에 항복하려는 것을 저지하다 실패하자, 군사를 남오(南澳)로 옮겨 계속 청에 저항했다. 1650년 아버지의 해상권을 이어받아 금문(金門)과 하문(厦門) 두 섬을 근거지로 무역을 하여 군비에 충당하는 한편, 자주 본토의 연안을 공략,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1659년 대규모 공격을 감행해 남경까지 진군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청나라 군대에 패하고 하문으로 후퇴했다. 1661년 청나라가 절강·복건·광동 등 연해 지역의 백성들을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자,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대만을 공략해 새로운 기지를 확보했다. 청나라를 반대하고 명나라를 다시 건국하겠다는 반청복명(反淸復明)과 대륙 반격의 강화를 기도했지만, 1662년 병사했다.

가계

정성공의 집안은 대대로 복건 연안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 할아버지 정소조(鄭紹祖)는 지방 정부의 말단 관리였으며, 할머니는 상인 가문인 황씨(黃氏) 집안의 딸이었다. 아버지는 정지룡(鄭芝龍)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으로 전천칠우위문(田川七左衛門)의 딸이다.

활동 사항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가 멸망한 뒤 양자강 이남에는 남명(南明)정권이라 불리는 명 왕실의 유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정권을 건립한 것은 1644년 5월 남경에서 즉위한 복왕(福王)이었다. 다음 해 5월 청나라 군대가 남경을 함락시키면서 복왕정권이 멸망하고 6월 당왕(唐王)이 복주(福州)에서 즉위하였다. 그해 9월 정지룡은 정성공을 데리고 당왕을 알현하였다. 이때 정성공은 ‘주(朱)’씨 성을 하사받고 충효백(忠孝伯)에 봉해져, 부마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당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까닭에 ‘국성(國姓)’ 혹은 ‘국성야(國姓爺)’라 불리게 되었다(『현종실록』 11년 7월 11일).

청나라에 회유를 당한 아버지 정지룡이 1646년 11월 투항하였는데, 당왕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던 정성공은 당시 형세를 분석해가며 아버지 정지룡의 투항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투항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당왕과 황후가 사망하고 아버지 정지룡이 북경으로 압송되었으며, 어머니가 청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정성공은 1647년 1월 정식으로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건 무렵, 마땅한 근거지가 없던 정성공은 하문 앞바다의 작은 섬인 고랑서(鼓浪嶼)를 근거지로 전열을 정비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1648년과 1649년 정성공은 세력 확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전히 공고한 근거지를 갖지 못하다가 1650년 8월에 이르러서야 하문과 금문을 점령하여 고정된 근거지를 확보하고 4만여 명의 부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1651년부터 내륙으로 진출을 꾀하고 최종적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기 위해 연해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는 북으로는 대략 항주만 유역으로부터 남으로는 조주에 이르는 절강과 복건의 연해 지역을 1차 공략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1658년까지 7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종 연해 지역에 확실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정성공은 청조 타도의 가망이 보이지 않자 지금까지의 전략 노선을 바꿨다. 그 과정에서 반경종(潘庚鍾)과 진영화(陳永華)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한 연해 지역 대신 일시에 남경을 점령하여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자는 제안을 내놓자, 이에 동의한 정성공은 1658년 7월 17일 17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였다. 1659년 봄 주산(舟山)에서 전열을 정비한 정성공은 뜻을 같이하는 장수 장황언과 연합하여 양자강으로 진입하였으며, 8월 26일 남경성(南京城)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경 공략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정성공은 1659년 10월 본거지인 하문에 돌아와야만 했다.

청나라는 산동·강소·절강·복건·광동 연해 지역의 백성을 내지로 40리가량 강제 이주시키는 해금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성공은 병사 충원과 군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반청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특히 애로를 느낀 부분은 군량 문제였는데, 1649년부터 1661년까지 군량 확보를 위해 44차례나 병사를 절강·복건·광동 등지에 파견해야 할 정도로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금문과 하문의 안전이 수시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성공은 부득이 전략을 수정하여 장기 항전에 필요한 새로운 기지를 구하고자 했다. 1661년 1월 일부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만 공략을 최종 결심한 정성공은 아들 정경(鄭經)으로 하여금 하문과 금문을 지키도록 하고, 4월 21일 400척의 선박과 2만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문을 출발해 다음 날 팽호(澎湖)에 도착하였다. 당시 대만은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었다. 1662년 2월 10일 화평조약을 맺고 네덜란드군이 떠남으로 인해 38년에 걸친 네덜란드의 대만 통치는 종지부를 맺게 되었다.

대만을 차지한 정성공은 대만을 동도(東都)라 칭하고 적감(赤嵌)을 수도로 삼아 명경(明京)이라 이름하였으며, 천흥(天興)과 만년(萬年)의 두 현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대만에 상륙한 지 1년여 만인 1662년 6월 23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건 정성공은 남명의 계왕(桂王)영력제(永曆帝)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여 1648년 이후 위원후(威遠侯), 연평공(延平公), 장국공(漳國公)에 봉해진 뒤 1653년에는 연평왕(延平王)에 봉해졌다. 애초 왕위 책봉을 고사했던 정성공은 다음 해에 책봉을 받아들였으며, 이때부터 그는 연평왕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가 통치하는 구역은 연평왕국 혹은 정씨왕국이라 불렸다.

조선은 정성공과 남명정권에 대한 정보에 관심을 가졌다. 섬으로 들어가서 청에 저항하였다는 이야기(『현종실록』 8년 10월 2일), 정성공 사후 그의 아들 정경이 뒤를 이었다는 정보(『현종실록』 8년 10월 3일) 등이었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김영신, 『대만의 역사』, 지영사, 2001.
  • 임종욱, 『중국역대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
  • 조서선 클레멘츠 지음, 허강 옮김, 『해적왕 정성공』, 삼우반, 2008.
  • 김란, 「민족주의 경합의 장으로서의 ‘정성공’ 역사영웅 만들기」, 『사회와 역사』1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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