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방(李永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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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의 무순 공격 당시 투항한 명조의 장수로, 누르하치의 손녀와 혼인하여 푸시 어푸[fusi efu, 撫西額駙]라는 부마 칭호를 얻은 인물.

개설

이영방은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의 무순(撫順) 공격 당시 투항하여 관직을 받고 누르하치의 손녀사위가 되었으며, 이후 후금의 여러 군사 활동에 참여하였고 세습 봉작을 받았다.

가계

누르하치의 일곱번째 아들 아바타이([阿巴泰], abatai)의 딸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이영방은 원래 명의 유격(遊擊)이었는데, 1618년 누르하치가 그가 주둔한 무순을 공격하자 곧장 후금에 투항하였다. 누르하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영방을 3등부장(三等副將)으로 삼고 아들인 아바타이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이후 이영방은 청하(淸河)·철령(鐵嶺)·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를 함락시킬 때 함께 종군하여 그 공으로 3등총병관(三等總兵官)에 제수되었다. 1627년에는 아민(阿敏, amin)이 지휘하는 후금군이 조선을 공격한 정묘호란에도 종군하였는데, 전략 수립 과정에서 아민과 마찰을 빚어 ‘오랑캐(蠻奴)’라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양성(佟養性)과 함께 투항한 한인에 대한 누르하치의 우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주 언급되었다. 이는 누르하치를 접견한 만포첨사정충신을 위하여 열린 잔치에 이영방이 동양성과 함께 참석하였다는 기록이나(『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조선이 모문룡(毛文龍)의 후금 투항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투항하더라도 이영방과 같은 위세는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인조실록』 4년 8월 19일). 이영방은 1634년 사망하였고, 그의 관작은 정람기(正藍旗) 한군(漢軍)으로 편제된 후손들이 세습하여 건륭제의 시대까지 10차례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만주실록 역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2014.
  • 이블린 S. 로스키, 구범진 역, 『최후의 황제들』, 까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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